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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제발 그 사람과 함께 하게 허락해줘...” 송여진의 입가로 피가 새어 나왔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것처럼 촘촘한 아픔이 덮쳤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주지한을 보고 있노라니 눈물이 앞을 가리며 후회가 밀려왔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주지한을 옆에 가두는 바람에 두 사람은 평생을 서로를 미워하는 데 허비했다. 다만 죽기 직전 집념이 너무 셌는지 다시 눈을 떠보니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주 대표님 찾았습니다. 하지만... 기억을 잃었는지 안 가겠다고 버티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업계에서 높은 권위를 가진 전문가에게 연락해 주 대표님이 기억을 회복할 수 있게 추진하겠습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송여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사라진 주지한을 찾은 날로 회귀한 것 같았다. “아가씨, 대표님 모셔 올까요?” “아니.” 송여진이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외쳤다. 목소리가 어찌나 날카로운지 송여진 본인도 놀랄 정도였다. 순간 넋을 잃은 비서가 말을 버벅댔다. “네. 그러면...” 익숙한 대화는 저번생에 주지한을 찾았을 때와 똑같았다. 다만 송여진은 저번 생에 주지한을 억지로 데려왔고 결과는... 송여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생에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고 죽기 전 주지한이 해준 말과 희끗한 머리가 밧줄처럼 심장을 죄어와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팠다. 송여진은 겨우 북받치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비서에게 말했다. “먼저 전문가 찾지 말고 자료부터 넘겨. 우리 사람들 철수하라고 하고.” 떠나가는 비서의 뒷모습을 보고 송여진은 어릴 적을 떠올렸다. 주지한은 송여진의 머리핀을 도로 가져오려고 또래 아이들과 싸우다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웃으며 머리핀을 내밀었다. “지니야. 울지 마. 내가 있는데 누가 감히 너를 괴롭혀.” 16살 적에는 송여진이 양아치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걸 보고 열댓 명을 상대로 혼자 덤벼들었다가 칼을 8번이나 맞았음에도 우는 송여진을 위로했다. “지니야, 너만 괜찮으면 됐어.” 18살 적에는 스카이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려 터지는 불꽃 아래 이렇게 말했다. “지니야, 나 너 좋아해도 돼?” 주지한이 송여진을 목숨보다 아낀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송여진은 이런 행복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쇼핑몰에 불이 났고 주지한은 송여진을 보호한다고 몸으로 빈틈없이 감쌌다.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주지한의 어머니 진성희가 탄 천 쪼가리를 내밀며 울먹였다. “여진아, 지한이... 먼저 갔어...” 절망한 송여진이 주지한을 따라가려는데 진성희가 이렇게 말했다. “여진아, 지한이 하늘에서 보고 있다면 네가 이러는 거 보고 싶지 않을 거야.” 이 말이 송여진을 죽지도 못하고 산송장처럼 살게 했다. 그러다 송여진은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뒷모습 사진으로 귀신에게 홀린 사람처럼 3년을 꼬박 찾아다녔다. 겨우 살아있는 주지한을 발견했는데 기쁨도 잠시, 송여진은 주지한이 기억을 잃고 서유진과 사랑에 빠졌음을 알게 되었다. 서유진은 송여진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사람인데 말이다. 그때 경쾌한 벨 소리가 송여진을 사색에서 끄집어냈다. 얼떨결에 해외에 있는 부모님에게 전화한 것이다. 전화가 걸리자 송여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국내에 등록된 내 신분 말소해 줘요.” “여진아.” 송여진의 아버지 송정국은 크게 놀랐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다만 빨라도 보름은 걸릴 거야.” “네.” 송여진이 창밖을 내다봤다. 날씨는 햇빛이 적당했고 미풍이 산들산들 불었다. “보름 뒤에 그쪽으로 건너갈게요.” 전화를 끊은 송여진은 만성 백혈병 진단서를 들고 주씨 가문을 찾아가 파혼을 꺼냈다. 이 말에 주지한의 아버지 주충섭과 어머니 진성희가 크게 놀라며 되물었다. “갑자기 왜?” “그게...” 송여진은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목소리만큼은 아주 차분했다. “지한은 기억을 잃어서 우리 과거도 다 잊었어요. 그러니 약혼한 사실도...” “미래가 있는지도 모르는 내게 억지로 묶여있을 바에는 지금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있는 게 더 나아요. 저는 지한이 저를... 저를 미워할까 봐 걱정이에요.” 진성희가 눈시울을 붉히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지한이 왜 너를 미워하겠어? 너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아이인데. 그런 너를 두고 다른 사람과 결혼할 리가 없잖아.” 송여진은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사진을 몇 장 꺼냈다. 해 질 무렵의 해변가, 여자가 옷깃을 정리하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주지한이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사진을 확인한 주충섭과 진성희가 넋을 잃는데 송여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꿈을 꿨어요. 억지로 지한을 데려왔는데 그 여자가 바다에 투신해 자살하는 바람에 우리는 평생 서로를 미워하다가 쓸쓸하게 끝을 맞이하더라고요.” “아저씨, 아주머니, 나는 그 지경까지 가고 싶지 않아요.” 이 말은 진심이었다. 저번생에 억지로 기억을 잃은 주지한을 집으로 데려왔다가 단식 투쟁을 벌이는가 하면 병실에서 뛰어내려서라도 서유진의 곁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다 기억이 회복되고 나서야 겨우 잠잠해졌는데 서유진이 바다에 투신해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경찰서에서 시신을 인수 인계받으면서 서유진의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 주지한이 삶을 비관하며 따라가려는 걸 송여진이 애원하며 겨우 막았다. 다만 송여진은 그때 주지한의 눈동자에 어린 원망을 보아내지 못했다. 주충섭과 진성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들이 아는 주지한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진성희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그러면 너는...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송여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에 부모님이 업무로 외국 나가실 때 저는 혼약이 있어서 여기 남았잖아요. 그동안 보살펴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지금은 부모님도 제 상황을 알고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주셨거든요. 보름 뒤에 절차를 마치면 바로 나갈 생각이에요. 그리고 두 분 의료 업계에 종사하고 계셔서 저도 완치할 확률이 올라가고요.” 진성희는 송여진의 감정을 알아채고 조심스럽게 애원했다. “그러면 여진아, 가서 우리 대신 지한을 데려오면 안 될까?”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이 지경까지 왔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주지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송여진이 얼마나 절망했는지 진성희는 두 눈으로 직접 봐서 다 알았다. 이러다 뒤에 주지한이 기억을 회복할 수도 있는데 진성희는 그게 누구든 평생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았으면 했다. 주충섭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회사가 바빠서 우리는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는구나.” 송여진은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지만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송여진은 주지한과 서유진이 지내는 섬에 상륙했다. 대문으로 걸어간 송여진이 보디가드에게 말을 걸려는데 안에서 날아온 사기그릇에 이마를 부딪쳐 피가 철철 흘렀다. 피가 눈 앞을 가려서인지는 몰라도 주지한의 목소리가 먼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주씨 가문이고 재벌이고 다 필요 없어.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건 유진과 보내는 소소한 일상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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