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Open the Webfic App to read more wonderful content

제1화

“출장 가서 두 달 만에 고작 한 번이라니? 어디 안 좋아?” 이른 아침부터 뜨거운 시간을 보낸 허소원은 마치 기사회생한 사람을 연상케 했다. 온몸은 땀이 흥건한 채 나른한 모습으로 숨을 고르며 단단한 허리를 끌어안고 물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에 가서 샤워하려던 순간 들려오는 말에 남자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그녀의 턱을 치켜들었다. 이내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 아직 부족해?” “당연하지. 누구 덕분에 웬만큼 해서는 만족이 안 되더라고. 정 힘들면 얼른 병원에 가서 치료해. 괜히 눈치 보여서 미루지 말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거친 키스를 퍼부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허소원은 눈앞의 남자가 적극적인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설령 사랑이 없는 관계일지언정 매번 절정에 이르고 나면 마치 연인을 대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박태진과 결혼한 지도 어언 2년이 되었고 마음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이 없었다. 언젠간 아이를 갖는 게 그녀의 숙원이었으니까. 곧이어 허소원은 양팔로 넓은 어깨를 감쌌다.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을 때는 이미 오후 4시가 넘었다. 박태진은 문제는커녕 건강해서 탈이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게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서 평소처럼 셔츠와 정장 바지를 입었다. 훤칠한 몸매는 심플한 코디 덕분에 완벽한 비율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쭉 뻗은 다리와 준수한 외모,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는 조물주가 봐도 걸작이라고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시원한 눈매는 눈꼬리가 약간 올라갔으며 그윽한 눈빛은 깊고 애틋했다. 게다가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는 모습은 귀공자가 따로 없었다. 셔츠 단추를 느긋하게 채우던 와중에 남자의 휴대폰 벨 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박태진은 이내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 너머로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에 남자는 안색이 돌변했다. 잠시 후 통화를 마치고 가라앉은 눈동자로 허소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허소원은 피곤해서 잠들기 직전이었지만 겨우 의식을 유지하고 물었다. “왜 그래? 누군데?” 박태진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엄마야. 네가 허씨 가문 딸이 아니라고 하는데? 허정식과 혈연관계도 없고, 진짜 딸도 찾았대.” 허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 달 전, 몸이 편찮은 아버지가 병원에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그녀와 혈액형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고 나서 허씨 가문은 즉시 대대적으로 친딸 찾기에 나섰고, 약 2주 전에 허지유를 집으로 데려왔다. 당일 밤 집에서 성대한 환영 파티가 열렸고, 실수로 수영장에 빠진 허지유가 그 자리에서 범인이 그녀라고 지목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허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같이 욕설을 퍼부으며 ‘살인미수범’이라고 손가락질했다. 결국 혈연관계도 없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출장 가고 나서 두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박태진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가 돌아오면 기회를 봐서 알려주려고 했는데 시어머니 송연희가 먼저 말을 꺼낼 줄이야. 허소원은 고개를 끄덕였고 저도 모르게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맞아. 어머님이 뭐라고 하셨어?” 박태진의 어조는 무덤덤했고 마치 본인과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말했다. “애초에 두 집안에서 정한 결혼이라 이제 친딸을 찾았으니 진짜 주인을 맞이할 때가 왔다고 해.” 뜻인즉슨 허지유에게 자리를 돌려주라는 것이었다. 허소원의 안색이 대뜸 어두워졌다. 신분이 바뀔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박태진과 결혼한 지 2년이 지난 건 불변의 사실인데 이제 와서 물러나라니? 하지만 시어머니의 의견보다 박태진이 무슨 생각하는지 더욱 궁금했다. “태진 씨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허소원은 주먹을 불끈 쥐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2년 동안 부부로 살면서 자신보다 더 완벽한 전업주부는 없다고 자부했다. 남편의 의식주를 직접 챙겨주며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설령 그녀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호감은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의 대답이 들려오는 순간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뼛속까지 한기가 파고들었다. “글쎄, 부모님이 정한 결혼이라 상대가 누구든지 나한테 큰 의미는 없어. 이따가 저녁 비행기로 며칠 출장 가야 해서 먼저 갈게.” 말을 마치고 나서 허소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장 재킷을 들고 문을 나섰다. 쿵. 문이 닫히는 순간 허소원은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마치 칼에 찔린 것처럼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머릿속에는 남자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아무나 괜찮다는 뜻인가? 하긴, 박태진에게 결혼은 단지 옵션에 불과했다. 어쩌면 모든 게 그녀의 희망 사항일지도 모른다. 허소원은 그제야 박태진이 얼마나 차가운 남자인지 깨닫게 되었다. 아마 평생 애를 써도 마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가 떠나고 1시간이 지나자 송연희가 이혼 합의서를 들고 찾아왔다. 이내 서류를 내동댕이치며 욕설을 퍼부었다. “결혼한 지 2년이나 되는데 임신은커녕 친딸 행세하는 가짜였다니! 내가 진작에 복이 없는 얼굴상이라고 했지? 역시 어른의 눈썰미는 못 속인다니까? 신원 불명에 살인 미수까지, 이렇게 심보가 고약한 악녀가 우리 아들 배필로 가당키나 하겠어? 당장 사인하고 제 발로 기어나가!” 안 그래도 기분이 우울한데 이혼 합의서까지 받게 되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잠시 후 비로소 목소리를 되찾고 말했다. “태진 씨가 시킨 거예요? 아니면 어머님의 뜻인가요?” 송연희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내 말이 곧 태진이 생각이지, 뭐. 너 같은 애가 우리 아들 배필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둘이 이혼하면 다음 달에 태진은 지유와 결혼식을 올릴 거야. 박씨 가문의 며느리 자리는 애초에 지유의 것이었으니까.” 허소원은 심장이 따끔거렸다. 한시라도 지체하기 싫다는 건가? 아직 비행기에 오르기도 전에 이혼 합의서부터 보내다니. 그녀는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애써 참으며 서류를 훑어보았다. 빈털터리로 쫓겨나는 신세와 다름없는 내용을 확인하자 씁쓸함이 밀려왔다. 요즘은 가사 도우미도 일하면 월급을 받는 세상인데 무려 박씨 가문의 며느리라는 사람이 단 한 푼 받지 못하고 내쳐지다니! 허소원은 헛웃음만 나왔다. 송연희는 그녀가 돈이라고 요구할까 봐 지레 겁을 주었다. “왜? 불만이라도 있어? 만약 신분만 바뀌지 않았더라면 지난 2년 동안 호의호식하며 사모님 노릇이나 했겠니? 똑똑히 들어, 괜히 콩고물이라도 기대하지 말고 얼른 사인해! 사람까지 동원하게 하면 서로 피곤하잖아.” 허소원은 목구멍이 꽉 막힌 기분이 들었다. 결국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서류에 서명했다. 목적을 이룬 송연희가 이쯤에서 물러설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계속 다그쳤다. “그리고 결혼반지도 당장 내놔. 유명한 장인이 직접 제작한 아프리카 블루 다이아몬드라 수십억이 넘는데 너 따위가 넘볼 수 있는 게 아니야. 참, 목걸이 세트도 전부 반납해.” 허소원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한 번도 착용한 적이 없어서 금고에 그대로 보관하고 있어요.” 결혼식 날을 제외하고 평소에는 손을 대지도 않았다. 송연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나마 눈치는 있군. 하여튼 우리 집 물건은 가져갈 생각하지 마.” 허소원은 혐오감이 밀려왔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물건도 아닌 데 관심 가질 이유가 있겠어요?” 사람이든 물품이든 애초에 소유한 적이 없었다. 그제야 만족한 송연희는 사람을 시켜 허소원의 짐을 싸게 하고 집에서 내쫓았다. ... 일주일 후, 명담 고속도로. 벤틀리 리무진 행렬이 세온시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차 안, 고귀한 기품을 내뿜는 젊은 남자가 휴대폰에 대고 지시를 내렸다. “소원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어. 지금 데리러 가는 길이니까 안 와도 돼.” “장난해? 실종된 지 20년 만에 겨우 행방을 알아냈는데 당연히 내가 픽업하러 가야지. 이미 헬리콥터를 십여 대 동원했어.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집에 데려오기 위해서는 이 정도 스케일은 되어야지 않겠어?” “소원은 우리 집안의 유일한 여자아이라서 모두가 손꼽아 기다린다고. 고작 열 몇 대로 되겠어? 더 불러. 적어도 대열은 갖춰야 성의가 있어 보이지.” 세 사람이 옥신각신하고 있는 와중에 중후한 목소리가 문득 울려 퍼졌다. “썩 꺼지지 못해? 소원은 내 딸이야. 너희들은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기나 해, 엄마랑 직접 데리러 갈 테니까.” 세 사람은 동시에 받아쳤다. “아무튼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데려오는 거로 하시죠. 설령 부자지간이라도 어림없어요!” ... 6년 후, 세온종합병원. 허소원이 6시간에 걸친 수술을 마치고 나서는 순간 명담에 있는 딸 가은의 문자 폭격을 당했다. [엄마, 오늘 집에 새 아빠를 운운하며 혼담을 꺼내러 온 사람이 여러 명이 되는데 외할아버지께서 화가 나서 멍멍이를 풀어 전부 내쫓았어요. 외삼촌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냐며 죽고 싶어 환장했냐고 묻자 얼마나 당황하던지, 너무 웃겼어요.] [다들 자기 주제도 모르고 말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고 예쁜 엄마인데 당연히 멋진 남자랑 결혼해야죠.] [걱정하지 마세요. 어중간한 아저씨는 제가 알아서 거를 테니까 엄마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허소원은 문득 실소를 터뜨렸고 아수라장이 된 집안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싶었다. 이내 웃으면서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 우리 딸.] 그러고 나서 휴대폰을 집어넣고 휴게실에 가서 쉬려고 했다. 간호사 스테이션을 지나치는 순간 수군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아빠를 위해 병원을 찾은 꼬맹이라고 하던데 치료에 성공하면 새엄마로 받아들일 거래요. 무려 최고 명문가의 꼬마 도련님이잖아요!” “네? 그럼 의술이 제일 좋은 사람한테 맡겨야 하겠네요. 진여리 선생님이 딱이지 않아요?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예쁘고.” 허소원은 남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새아빠가 되겠다고 찾아온 남자가 있다는 딸의 문자를 보자마자 새엄마를 운운하는 간호사들의 말에 호기심이 발동해서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곧이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어린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얼굴은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젖살이 통통한 볼은 탄력이 넘쳤고 앙증맞은 입술과 새하얀 이까지 더해 유난히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녀석은 의자에 앉아 짤막한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새까만 눈동자로 주변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Previous Chapter
1/100Next Chapter

© Webfic, All rights reserved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