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앞에는 얼굴이 아리따운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조신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꼬마야, 안녕. 난 진여리라고 해. 실력은 걱정 안 해도 돼. 너희 아빠 꼭 치료해줄게.”
자기소개가 끝나자 녀석의 토실토실한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다.
오늘 아빠와 함께 진료를 받으러 온 건 맞지만 새엄마를 찾겠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이런 황당한 소문을 대체 누가 퍼뜨렸단 말인가?
게다가 눈앞의 아줌마는 자기 주제도 모르는 듯싶었다. 화장을 얼마나 두껍게 했으면 가늠조차 안 갔다.
녀석은 싫은 티를 팍팍 냈다.
허소원은 아이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비록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이상하게도 꼬맹이의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다.
“풉.”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렸다.
그녀를 발견하자 다들 재빨리 일어나서 공손하게 말했다.
“맨디 선생님.”
곧이어 누군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분을 깜빡하다니! 수술 때문에 잠깐 들른 거라지만 맨디 선생님이야말로 명의에 버금가지 않나요? 진여리는 발끝에도 못 미치죠.”
허소원은 그제야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색하며 말했다.
“죄송해요. 방해할 의도는 아니었어요. 다만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저 꼬마는 새엄마를 찾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거든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오해라니?
하지만 병원의 ‘소식통’인 청소부 아주머니가 병원장실 문 앞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어찌 착각할 수 있지?
“그걸 선생님이 어떻게 알아요?”
갑자기 튀어나온 불청객 때문에 진여리는 불만이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허소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감이죠, 뭐.”
진여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던 찰나 의자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녀석을 발견했다.
“이모 말이 맞아요. 새엄마를 찾을 생각이 없었지만 이제 마음이 바뀌었어요. 이모한테 첫눈에 반했어요! 저랑 같이 집에 가실래요? 제 엄마가 되어주세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허소원도 마찬가지였고, 뜬금없는 고백에 넋을 잃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진심은 아니겠지?
이내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머금은 채 꼬맹이를 바라보았다.
“꼬마야, 새엄마를 찾는 게 장난인 줄 아니? 네가 이러는 걸 아빠는 알고 계셔?”
녀석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 집에서 저한테 토를 다는 사람은 없어요. 제가 된다고 하면 되는 거예요.”
허소원은 기가 막혀서 웃음이 터져 나왔고 어디까지나 농담이라고 여겼다.
가은도 장난기가 많은 편이라 가끔 유난히 잘생긴 남자를 보면 너스레를 떨곤 했다.
“이 정도면 우리 아빠로 딱인데요?”
아마 녀석도 딸과 비슷할지 모른다.
허소원은 곧바로 허리를 숙여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모는 누군가의 새엄마가 되어줄 생각은 없으니까 다른 사람으로 알아봐. 그럼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
말을 마치고 나서 손을 내린 다음 즉시 자리를 떠나 휴게실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허소원은 방금 겪은 해프닝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우연히 만난 꼬맹이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추억에 젖어 들었다.
머릿속으로는 일찍이 요절한 아들이 생각났다.
당시 무사히 살아남았더라면 지금쯤 녀석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6년 전, 박태진과 이혼하고 나서 갈 곳을 잃은 그녀는 먹고살기 위해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했으나 허씨 집안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기 직전 친부모와 오빠들이 찾아와서 그녀를 명담으로 데려갔다.
나중에 임신하게 되어 이란성 쌍둥이를 낳았지만 남자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고 여자아이만 살아남았다.
과거를 떠올리는 순간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전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데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곧이어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돌아갈 준비를 했다.
방금 고난도 수술을 마친 직후라 피곤함이 몰려와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떡하니 서 있는 꼬맹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휴게실까지 따라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지라 의아한 나머지 눈썹을 까딱했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건가?
박은성이 그녀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방금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제대로 못 봤지만 미인이실 거로 생각했거든요? 역시나 내 추측이 맞았네요! 제가 눈썰미 하나는 기가 막히죠. 이모, 너무 예쁘세요!”
허소원은 헛웃음만 나왔다.
이런 입에 발린 소리는 대체 어디서 배웠단 말이지?
정말 그럴싸하지 않은가?
이렇게 어린데도 벌써 사람을 구슬릴 줄 아는데 크면 얼마나 더하겠나 싶었다.
허소원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녀석의 통통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무리 추켜세워도 네 새엄마가 되어줄 생각은 없어.”
꼬맹이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요? 우리 아빠 엄청 잘생겼어요. 완전 미남형이거든요? 이모랑 천생연분이라니까요?”
녀석은 아빠를 자랑하기 급급했다.
허소원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냥. 더욱이 너희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잖니. 게다가 외모가 전부는 아니란다. 제일 중요한 건 이모는 지금 결혼할 생각이 없으니까 포기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녀석의 어깨가 축 처졌다.
비록 처음 만나는 여자이지만 왠지 모르게 이루 형언하기 힘든 친근감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한테서 전혀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본인이 딱 잘라 거절한 이상 마지못해 현실을 받아들였다.
“알았어요.”
이내 재빨리 말머리를 돌렸다.
“그럼 우리 아빠 치료라도 해주세요. 방금 물어봤는데 다들 이모의 실력에 혀를 내둘렀죠. ‘신의 손’으로 불리는 분이라며 고난도 수술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라고 했어요. 아빠가 오래전부터 앓고 계신 지병이 있는데 그동안 많은 의사가 두 손 두 발을 들었죠. 그러니까 병 치료 부탁만큼은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이어가는 와중에 녀석의 얼굴은 기대로 가득했다.
허소원은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세온시에서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수술도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고 마지못해 도와줬던 것이었다.
하지만 꼬맹이의 표정을 보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약해져서 차마 거절하기 힘들었다.
이내 흔쾌히 대답했다.
“알았어. 아빠 지금 병원에 계셔? 아직 떠나기 전이라면 같이 가서 확인해보자. 치료가 가능한 상태라면 최대한 도와줄게.”
꼬맹이는 두 눈이 반짝거리더니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네네! 지금 병원장님 사무실에 계세요. 저랑 같이 가요.”
말을 마치고 오동통한 손가락으로 마치 그녀가 도망가기라도 할까 봐 손을 꼭 붙잡았다.
허소원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고 녀석의 손을 잡고 뒤따라갔다.
...
한편, 병원장실.
박태진은 방금 안상혁과 이야기를 마쳤다.
오늘 병원을 찾은 목적은 맨디를 소개받기 위해서였고 대신 병원에 여러 가지 의료기기를 기부했다.
안상혁은 열과 성의를 다해서 그를 배웅했다.
하지만 밖에 나오자마자 아들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어졌다.
이내 싸늘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은성은?”
비서인 정시훈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망갔어요. 오늘 대표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누가 흘렸는지 치료에 성공하는 사람이 재벌집 사모님이자 도련님의 새엄마가 된다는 소문이 병원에 쫙 퍼졌죠. 그래서 출처를 알아본다고 하면서 가버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