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그녀는 그 남자의 다리 위로 넘어졌을 뿐만 아니라 벨트까지 풀어버린 셈이었다. 허소원의 얼굴이 순간 화끈 달아올랐다. ‘왜 자꾸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 거야? 나한테 무슨 저주하고 내린 건가...?’ 게다가 이번에도 하필이면 박태진, 그 남자 앞이었다. ‘이번엔 또 뭐라고 비웃을까? 일부러 그랬냐고 또 비꼬겠지. 진짜 지긋지긋하다.’ 허소원은 급히 손을 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진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그의 몸 위에 더는 붙어 있을 수 없었다. 더럽게 창피하고 숨이 턱 막혔다. 허소원은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다행히 수월했다. 하지만 막 일어나는 순간, 손목이 붙잡혔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어둠 속, 박태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했다. 사실 전에도 가끔 이 여자가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곤 했지만 그냥 넘겼다. 하지만 지금, 손목을 잡은 그 순간, 확실히 느껴졌다. 이 낯선 익숙함, 손끝에 닿은 뼈마디, 가는 손목, 차가운 촉감. ‘허소원...?’ 그 이름이 불쑥 떠올랐다. 그녀도 뼈가 도드라지고 깡마른 손의 체형이었다. 박태진은 확인하듯 그녀의 손을 살짝 눌렀다. 허소원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설마 이 남자 뭔가 눈치챈 건가?’ 당황한 그녀는 손을 확 빼며 냉랭하게 말했다. “박 대표님, 선 넘지 마세요. 아까는 정전이라 어두워서 그런 거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처럼 무례하게 나와도 되는 건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잽싸게 몸을 빼며 몇 걸음 물러섰다. 심장이 요동쳤고 손끝이 떨렸다. ‘들켰나? 아니야. 아닐 거야...’ 박태진은 허소원의 손끝에서 사라진 감촉을 느끼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맨디도 체구가 작긴 했지만 이 여자의 말투나 태도는 전혀 달랐다. 이 여자는 훨씬 더 또렷하고 단단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박태진이 담담히 말했다. “무례하다니, 재밌는 말이네요. 벌써 세 번째죠, 맨디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