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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그 말에 이성범이 화들짝 놀랐다. 주름 잡힌 얼굴은 의아함으로 가득 찼다. “이서야. 갑자기 왜... 그 망할 놈이 또 너 괴롭혔어?” 진이서는 눈꺼풀을 축 늘어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괴롭혔다라, 십 년 넘게 냉랭하게 굴었다면 괴롭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이서는 어릴 적 부모를 여의고 보육원에서 자라다가 8살 되던 해 이성범의 손에 이끌려 이씨 가문으로 왔다. 이성범은 이준서가 자폐 스펙트럼을 앓고 있어 말하기를 꺼리고 사람을 싫어하는데 자기가 명을 달리하면 손자를 챙길 사람이 없을까 봐 진이서를 데려와 집과 의지할 곳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말했다. 데려올 때부터 이준서의 신붓감으로 데려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진이서는 철이 들면서부터 쭉 이준서와 결혼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여 이준서가 눈길조차 주지 않고 대꾸도 하지 않고 모든 노력을 무시할 때도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고 옆에서 보살피며 생활을 챙겼다. 발병해서 물건을 부수다 다치면 진이서가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 끌어안았고 밥을 먹지 않으면 수고를 마다하고 음식을 덥혀 부드럽게 달랬고 사람들을 멀리하면 인내심 있게 조금씩 인도했다. 그렇게 일 년, 또 일 년, 진이서는 모든 청춘과 열정을 이준서에게 바쳤다. 여전히 차갑긴 하지만 상태는 점점 좋아져 일상생활은 물론 가족 기업까지 관리하게 되었다. 진이서는 이런 나날이 계속된다면 이준서가 아무리 녹일 수 없는 얼음 같이 차갑게 굴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한 비즈니스 파티,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강예슬은 실수로 인간 세상에 떨어진 요정 같았다. 이준서의 눈빛은 처음으로 한 사람에게 꽂혔고 더는 떼지 못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진이서에게 완전한 한마디로 명령했다. “외투 벗어서 줘. 추워 보여.” 순간 진이서는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가슴이 너무 아팠다. 진이서가 묵묵히 카디건을 벗어주자 이준서는 조심스럽게 강예슬의 몸에 걸쳐줬다. 진이서에게는 보인 적이 없는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그 뒤로 이준서의 세상은 강예슬만을 위해서 열렸다. 강예슬을 보고 웃는가 하면 강예슬이 하는 말을 인내심 있게 들어주기도 했다. 강예슬이 좋다는 건 다 가져다 바쳤고 강예슬의 전화 한 통이면 중요한 회의도 제쳐두고 달려갈 정도였다. 어쩌다 강예슬이 미간을 찌푸리기라도 하면 보기 드물게 긴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진이서가 청춘을 다 바쳐도 가지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지진이 닥쳤을 때 진이서를 폐허에 던져두고 강예슬을 품에 안은 채 현장을 떠났다. 심지어 다쳤는데도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진이서는 그제야 어떤 물건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사랑이나 이준서의 마음 같은 것 말이다. 십 년 넘게 옆을 지키며 챙겨줬지만 이준서에게는 나타난 지 3개월도 채 안 되는 강예슬보다 못했다. 진이서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애써 억울함을 삼켰다. “할아버지. 오늘 일은 할아버지도 들어서 알고 계실 거예요. 지진이 났을 때 준서는 강예슬 씨를 데리고 가버렸죠. 아까 문 앞을 지나가는데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러니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하더라고요. 사랑은 억지로 밀어붙인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어차피 준서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데, 아니 어쩌면 싫어하는데 이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성범이 미간을 찌푸리게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서야... 지금까지 준서 옆을 지킨 사람은 너잖아. 갑자기 바뀌면 준서가...” “할아버지.” 진이서는 피곤하지만 경멸에 찬 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도 보셨잖아요. 최근에 강예슬 씨와 만나면서 상태가 예전보다 좋아진 거. 이제 웃기도 하고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줄도 알고 감정 표현도 곧잘 해요. 어쩌면 내가 떠나는 게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몰라요. 준서가 마음을 여는 데는 강예슬 씨가 더 필요해요.” 이성범이 넋을 잃었다. 진이서가 말한 것처럼 강예슬이 나타난 뒤로 이준서는 확실히 많이 변했다. 긴 정적이 이어지는데 이성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몇 살은 더 늙은 것 같았다. “그래. 네 마음이 그렇다면야 할아버지도 존중할게...” ... 병원에서 이틀을 쉰 진이서는 5년간 지킨 집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침대맡에 놓인 서랍 제일 깊숙한 곳에서 서류 하나를 꺼냈다. [이혼 협의서] 이준서의 이름이 정갈하게 오른쪽 아래에 적혀 있었다. 익숙하지만 온기가 없는 필적을 보고 진이서는 가슴이 아팠다. 결혼한 지 5년이 되는데 이준서는 여전히 진이서를 역겨워했다. 조금만 심기를 거스르거나 잔소리하면 차가운 표정으로 이혼 협의서에 사인하며 당장 꺼지라고 말하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이 협의서를 받을 때마다 방에 숨어 몇 날 며칠을 울다가 이준서가 보는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지만 차수가 많아지면서 진이서의 마음도 무뎌졌고 더는 찢지 않았다. 최근에 다시 날아왔을 때는 이상하리만치 덤덤하게 받아서는 챙겨뒀는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진이서는 펜으로 을이라고 적힌 곳에 한 획 한 획 진지하게 이름을 써 내려갔다. [진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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