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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아빠, 왜 이제야 왔어요!” 아까는 허미경이 무서워 울먹이던 여희수가 온나연에게 보이던 냉담과 짜증을 싹 거두고 신이 나서 여경민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구슬처럼 동그란 큰 눈이 남자 등 뒤를 계속 살피며 잔뜩 기대한 채 물었다. “수민 이모는요? 왔어요? 희수는 수민 이모가 너무 보고 싶어요!” “오늘 밤 광고 찍어야 해서 당장은 못 와.” 여경민은 담담한 표정에 친밀하고 익숙한 말투였다. 마치 양수민이 그의 아내라도 되는 듯했다. “광고 찍어요? 완전 대단해요!” 여희수는 눈을 반짝이며 폴짝폴짝 뛰어 식탁으로 돌아가 자신이 완성한 수채화를 들고 왔다. “이건 수민 이모한테 주는 선물이에요. 아빠가 꼭 전해줘요. 우리 셋이서 앞으로도 같이 놀 거예요!” 공기가 그 순간 팽팽하게 죄어들며 숨이 막혔다. 온나연은 그 자리에 선 채로 무의식중에 손에 힘을 주었다. 불현듯 자신이 이 세 식구 속에서 불쑥 끼어든 우스꽝스러운 광대가 된 것 같았다. 존재의 의미가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 말이다. ‘양수민, 또 그 양수민!’ 여경민이 바람피운 세월 동안 그가 만난 여자가 몇이나 되는지, 이제는 셀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강한 위기의식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결혼을 정말로 지켜내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애가 한 말인데 마음에 담아두지 마.” 허미경이 온나연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위로했다. “어머니.” 여경민은 잠깐 아이를 달래고는 허미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를 빼 앉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온나연은 투명 인간 취급이었다. 어떤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엄마라고 부르지 마. 난 너 같은 무책임한 아들 둔 적 없어!” 분으로 가득 찬 허미경이 벌떡 일어나 따분해하던 여희수의 손을 잡았다. “가자. 오늘은 네 아빠랑 엄마의 날이야. 할머니가 너 놀이공원 데려갈게.” 놀이공원 소리에 여희수는 신나서 금세 허미경을 따라 나갔다. 넓은 방 안에는 순식간에 여경민과 온나연 둘만 남았다. 끝도 없는 침묵과 어색함도 함께 말이다. ‘7년을 함께 산 부부가, 왼손으로 오른손을 만지듯 익숙한 사이가 어색할 수도 있구나?’ 우스웠다. 참을 수가 없어서 그녀는 정말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웃어?” 여경민의 잘생긴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를 보는 눈빛은 차갑고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우리 마지막으로 단둘이 있었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해요?” 온나연은 웃음을 거두고 눈에 슬픔을 띠며 되물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색함은 생소함에서 온다는 것을. 어쩌면 이 결혼은 이미 속까지 다 죽어버렸을지도.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여경민은 자세를 고쳐 앉고 눈을 좁혀 그녀를 뜯어보았다. 감정은 없었고 오직 경계만 있었다. 온나연은 말없이 술 두 잔을 따랐다. 한 잔은 자신의 앞에, 한 잔은 여경민의 앞에 따랐다. “우리 결혼, 정말 가망이 없나요?” 그녀는 잔을 들고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여경민은 미간을 찌푸렸다. 눈에는 오로지 혐오만 가득했다. “이 결혼은 5년 전에 끝났어야 해. 네가 질질 끌며 안 헤어지는 건, 내가 너를 더 업신여기게 할 뿐이야.” “좋아요, 이혼해요.” 그 순간 온나연의 마음은 완전히 죽었다. 더는 무의미한 발버둥을 하고 싶지 않아서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7년 전, 저희 합환주를 마시며 부부가 됐죠. 7년이 지난 지금, 이 잔을 다시 저랑 같이 비워 줘요. 그러면 이혼에 동의할게요.” 여경민은 살짝 놀랐다. 수년간의 이혼 소동 끝에 이 여자가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가슴은 갑자기 덩굴 같은 헝클어진 밧줄이 던져진 듯 어수선했다. “온나연, 또 무슨 수작이야?” 그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헛수고야. 네가 무슨 수를 다 쓴다 해도 나는 너한테 눈길 하나 더 주지 않아. 진작에 진절머리 났거든.” “그럼 마셔요. 다 마시면 바로 이혼할게요.” 온나연은 싸늘하게 코웃음 치고 담담히 재촉했다. “좋아. 약속 지켜.” 여경민이 잔을 집어 들어 고개를 젖혔다. 온나연이 막았다. 그리고 자기 잔을 들고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돌아 들어가며 말했다. “말했잖아요. 합환주로요.” 여경민은 잠깐 멈칫했지만 아마 너무나 이혼이 급했을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동작에 맞췄고 결별을 상징하는 그 합환주를 함께 비웠다. “다 마셨어. 이제 약속 지켜서 빨리 나랑 갈라서.” 그는 잔을 탁자에 쾅 내려놓고 곧게 일어섰다. “이혼 합의서는 내일 보낼게. 희수는 내가 데려갈 거야. 재산은 네 마음대로 챙겨. 여씨 가문이 너를 박하게 대하지는 않아.” “문제없어요.” 온나연은 의자에 앉은 채 놀라울 만큼 침착했다. 대답도 단호했다. 여경민의 표정에는 다시금 놀라움이 스쳤다. 이미 어질러진 마음은 더 엉망이 되었다. 여희수는 그녀의 목숨 같은 아이인데 너무 쉽게 놓아버렸다. 그때 여경민의 전화가 울렸다. 양수민이었다. “오빠, 광고 촬영 끝났어요. 저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요. 언제 돌아와요?” “곧 가.” 여경민은 이유 없이 신경이 곤두서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볼 일 있어서 먼저 갈게.” “하룻밤도 안 돼요?” 온나연도 일어나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겨 자신 쪽으로 끌어오며 구미호같이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그 대단한 여 대표님이 애인 말만 따른다고요?” 여자의 숨결은 보이지 않는 그물처럼 여경민을 단단히 옭아맸다. 공기는 순식간에 농염해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온나연을 응시하며 숨은 점점 거칠어졌다. 희고 고운 그녀의 뺨에는 엷은 홍조 올랐고, 얇은 입술은 봄 복숭아 꽃잎처럼 보여 그의 마음을 휘저었다. 그는 무심결에 큰손으로 그녀의 가늘고 뾰족한 턱을 받치고는 입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온나연의 손이 차갑게 가로막았다. “어쩌죠? 애인분을 위해 정절 지킨다면서요?” 온나연의 눈빛은 차갑고 목소리에는 조롱이 가득했다. 여경민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온몸이 개미 떼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간질거리고, 속에서부터 열이 치솟아 터질 것만 같았다. “아니야, 그 술, 이상해.” 그는 머리를 털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온나연을 노려보았다. “온나연, 내가 너를 과대평가했네. 나랑 자려고 이런 저열한 수를 써? 좋아, 그럼 내가 들어주지!” 그는 통제를 잃은 짐승처럼 다시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거칠게 입술을 덮었다. “착각하지 마요.” 온나연의 눈에는 예전의 온기와 기대가 한 줌도 남지 않았다. 오직 냉담과 혐오뿐이었다. 그녀는 그를 밀쳐냈다. 여경민의 충혈된 눈에 당혹이 비쳤다. “그런 거 먹인 게 이러자고 한 거 아니었어?” 온나연은 비웃음만 흘리고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넥타이를 움켜쥔 채 객실에 딸린 휴게실까지 끌고 가 무표정하게 밀어 넣었다. “애인분을 위해 절개 지킨다면서요? 그럼 오늘 밤은 정말 잘 지켜봐요.” 말을 잇는 동시에 그녀는 두말없이 휴게실 문을 잠갔다. “온나연, 뭐 하는 거야? 문 열어!” 문을 두드리는 여경민의 손바닥이 쾅쾅 울렸다. 약기운이 올라 땀은 비 오듯 흘렀고, 산 채로 지옥을 겪는 듯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이혼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예비 전남편 씨.” 온나연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미소를 스치고, 손뼉을 한번 가볍게 치더니 말끔히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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