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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무슨 문제 있어요?” 온나연이 눈살을 찌푸리고 한 걸음 다가섰다. 여경민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혼 사유, 감정 파탄... 이게 문제예요?” “서식 문제.” 여경민의 낮은 목소리는 마치 얼음 창고에서 한 글자씩 튀어나오는 듯했다. “항목, 4호는 굵게 해야지.” 온나연은 어이가 없었지만 성질을 누르며 말했다. “그건 큰 영향 없어요. 내용만 맞으면 되잖아요.” “형식이 틀리면 창구에서도 안 받아. 내 시간은 귀해. 헛걸음하기 싫어.” 말을 끝낸 여경민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이혼 합의서를 온나연에게 쑤셔 주고 시계를 우아하게 돌려 보더니 돌아서 나가려 했다. “잠깐만요!” 온나연이 그의 손목을 홱 붙잡았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입술을 꼭 다물며 성질을 눌렀다. “사소한 문제예요. 바로 고칠게요, 그리고 사인해요.” 두 사람이 오래 살아오며 그의 트집 잡는 성격에는 익숙했다. 예전에는 그걸 꼼꼼하고 진지하다, 아니면 매력이 있다고 여겼지만, 사랑이 다 닳아버린 지금은 그저 깐깐하고 까다롭기만 했다. 다행히 곧 이혼할 예정이었다. 이런 성가신 사람 누가 모셔 가든 상관없었다. 어쨌든 온나연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 여경민은 아래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가 자기 손목을 붙든 손을 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비단처럼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힘도 있었다. 처음 손을 잡던 날, 그녀는 긴장해 손바닥이 땀범벅이었고, 그의 심장도 미친 듯 뛰었다. 그런데 지금 둘의 관계는 여기서 끝이 나려 했다. 얼어붙은 잘생긴 얼굴에 아주 미세한 동요가 스쳤다. “온나연, 사실은...” “잠깐만요, 금방 고쳐요.”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온나연은 재빨리 그의 손을 놓고 노트북을 끌어안아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타닥타닥 키를 두드리며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물었다. “방금 뭐라 하려고 했어요?” 여경민은 그녀의 집중하고도 다급한 모습을 보자 손가락을 무의식중에 꽉 말아쥐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말하고 싶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서두를 일은 아니라고. 이혼은 작은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녀가 1초도 더 엮이기 싫다는 듯 다급하게 달려드는 모습을 보자, 그의 속은 이유 없이 들끓었다. 펄펄 끓는 용암이 가득 차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수정을 마친 온나연이 인쇄 버튼을 눌렀다. 프린터가 소리를 내며 새 이혼 합의서를 한 장 한 장 밀어냈다. 그녀는 갓 뽑힌 합의서를 들어 다시 한번 훑어보고, 이상 없는 것을 확인하자 한데 모아 집게로 고정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해했다. “됐어요. 이번에는 문제없겠죠?” 다시 합의서를 내밀었다. 모든 동작이 번개처럼 빨랐다. 진짜로 1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은 태도였다. 여경민은 합의서를 바라보기만 하고 받지 않았다. 속은 오방색처럼 뒤섞였다. 그렇게 둘은 한동안 멈춰 섰다. 시간도 이 순간만큼은 멈춘 듯했다. “또 문제 있어요?” 온나연은 그의 의중을 가늠하지 못했다. ‘줄곧 이혼을 재촉했잖아. 이제야 내가 놓아 주겠다는데, 왜 이러는 거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구역질 나게 하려는 건가?’ “희수 양육권, 정말로 안 가져?” 오랜 침묵 끝에 여경민이 차갑지도 따듯하지도 않게 물었다. “아, 그거요...” 온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원하죠. 근데 당신이 주겠어요? 어머님은 허락해요? 두 분이 주신다면 저도 가져요.” 그녀가 지금껏 손을 놓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여희수를 놓을 수 없어서였다. 그러나 여경민 모자가 양육권을 내줄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혼은 곧 여희수와 떨어지는 걸 의미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말투를 보니, 아이를 그리 고집하지는 않는 듯했다. ‘그렇지. 양수민을 집안에 들이겠다면 굳이 데려가고 싶지 않겠지. 스무 살 갓 넘은 여자를 들이자마자 새엄마 만들 수는 없으니까. 참 감동적인 사랑이야.’ 온나연은 문득 웃음이 나왔다. 서른을 코앞에 둔 남자가 사랑에 눈이 멀어 아내와 딸을 내던질 줄이야. “희수 양육권은 다시 상의할 수 있다고 봐.” 여경민은 여전히 합의서를 받지 않았다. 평소의 차갑고 강경한 태도를 거두고 느닷없이 온건하고 합리적으로 변했다. “상의할 필요 없어요!” 온나연은 갑자기 숨이 막힐 만큼 괴로웠다. 모욕감이 가슴 깊숙이부터 스며 올랐다. 합의서를 쥔 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가며 통제를 잃고 소리쳤다. “말했잖아요. 원하면 가져가요. 저 양육권 없어도 돼요. 한 입으로 두말할 필요 없어요!” 그녀가 느낀 모욕은 여경민이 양수민 같은 여자 하나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까지 물러설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됐다. ‘진짜 그 정도로 사랑해?’ 여경민의 안색도 결코 좋지 않았다. 싸늘하게 그녀를 쏘아보며 따졌다.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 희수는 사람이야, 물건이 아니고. 그렇게 아무렇게나 대할 거야?” “내가 아무렇게나 대한다고요?” 온나연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이제 막 응어리진 화가 터지려던 바로 그때, 문가에서 여희수의 약하고 겁먹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엄마, 싸우지 말아요. 희수는 무서워요!” 여경민은 아이를 보는 순간 눈에 띄게 안도했다. 곧바로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꾸고 문가로 가 여희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바보야, 아빠 엄마가 언제 싸웠어. 자... 아빠가 새 장난감 사 왔어. 우리 내려가서 놀자.” 말을 마치자, 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여희수를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잠깐...” 번갯불처럼 사라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온나연은 허공의 공기만 움켜쥐었다. 이가 갈릴 만큼 분했다. ‘이게 다야? 매일 이혼하라고 닦달하더니 막상 사인할 때가 되자 도망가?’ 하지만 그녀도 여경민이 일부러 질질 끌며 이혼을 미루려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여희수 양육권이 걸려 있으니 신중히 고민해야 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온나연은 한숨을 쉬며 합의서를 챙겼다. 언젠가 여희수가 집에 없을 때 그 문제를 두고 여경민과 제대로 상의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래로 내려가 보니, 여경민이 여희수와 카펫 위에 나란히 앉아 블록을 쌓고 있었다. 블록은 금세 기본 틀이 올라갔다. 석양을 배경으로 내다보니 그림은 제법 정겹고 따뜻했다. 한때 온나연이 수없이 상상하던 장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 상상이 눈앞에서 펼쳐져도, 그녀의 속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엄마, 우리랑 같이 블록 쌓아요!” 계단 중간에 선 온나연을 발견한 여희수가 보들보들한 목소리로 손을 흔들었다. 아이의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아 온나연은 부드럽게 다가갔다. 블록 구역은 그리 넓지 않아서 여경민의 긴 다리가 절반을 차지하다시피 했다. 온나연은 옆에서 서 있기도 뭐하고 앉기도 뭐했다. 서 있자니 너무 뜬금없고, 앉자니 어쩔 수 없이 여경민과 몸이 닿을 터였다. 그런데 이제는 몸이 먼저 그를 거부했다. “앉아.” 여경민이 고개를 들어 머뭇거리는 그녀를 흘깃 보았다. 그의 얼굴빛도 썩 좋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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