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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저기...” 온나연은 여경민이 자리를 비킬 생각이 없는 걸 보고 담담하고도 선을 긋는 어조로 말했다. “좀 아닌 것 같아요.” “좀 아닌 것 같아?” 여경민은 그 말에 블록을 끼우던 긴 손가락을 멈췄다. 냉담한 얼굴에 기쁨도 노여움도 읽히지 않는 표정이 스쳤다. “우리 어쨌든 합법적인 부부잖아. 나란히 앉아서 애랑 블록 맞추는 게 뭐가 좀 아닌데?” “하.” 온나연은 비웃듯 코끝으로 웃었다. 속으로는 비아냥을 한 보따리 쏟아낼 기세였지만 고개를 돌리자 여희수가 한껏 집중해 성을 올리고 있어 더 말하기도 어려웠다. 그녀는 불편함을 삼키고 여경민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어젯밤 입었던 검은 슬립 미니 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자락은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오고, 앉자 드러난 희고 고운 다리가 어쩔 수 없이 여경민의 허벅지에 닿았다. 서늘한 촉감은 익숙하면서도 또 생경했다. 여경민의 목젖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속내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겉으로는 한가하고 태연해 보였다. 반면 온나연은 방석 위에 바늘을 깔아 놓은 듯 온몸이 불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둘은 어젯밤의 결별주 말고는 반년 넘게 어떤 신체 접촉도 없었다. 부부 생활은 이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의 살결 스침조차 이제는 친밀한 정도에 속했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는 몸의 낯섦과 거부감으로 드러났다. 온나연은 여희수와 블록을 맞출 마음이 없었다. 이곳을 당장 벗어나고 싶었고, 1초 더 머무는 것조차 고문이었다. “아빠, 이 지붕은 왜 그래요? 잘 못 맞추겠어요!” 여희수가 성 꼭대기를 가리키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살짝 좌절한 표정이었다. “어디 보자.” 여경민이 몸을 숙여 블록 쪽으로 팔을 뻗었다. 온나연이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있었기에, 여경민은 그녀 쪽으로 몸을 비켜야 블록을 집을 수 있었다. 그의 몸이 가까이 오자, 그녀는 금방이라도 자신을 덮칠 산을 마주한 것처럼 반사적으로 일어나 피하려 했다. “왜 피해?” 여경민이 번개처럼 그녀의 손목을 잡아 일어나는 걸 막았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그녀의 팔을 눌러 상체를 기대며 애매한 자세가 되었다. “내가 무슨 흉악한 짐승이라도 돼? 닿으면 큰일 나게?” “당신은 뭐라고 생각해요?” 온나연은 싸늘하게 그를 바라봤고 눈에는 혐오만 가득했다. “저는... 더러워서 싫어요.” “뭐라고?” 오전 내내 쌓인 그의 분노가 한순간에 타올랐다. 그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를 더럽다고 해?” “그러지 마요. 희수도 여기 있어요. 싸우고 싶지 않아요.” 온나연은 고개를 돌리려 애썼다. 그를 한 번 더 보고 싶지도 않았다. “누가 싸운대?” 여경민은 그녀의 얼굴을 억지로 돌려 정면을 맞췄다. 체리 같은 입술을 내려다보며 눈동자에 진한 소유욕이 번졌다. “난 그냥 희수한테 보여주고 싶을 뿐이야. 아빠 엄마가 얼마나 다정한지.” 말이 끝나자 그는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을 그대로 덮었다. “어...?” 여희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살짝 벌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봤다. 기억 속에서 아빠와 엄마가 이렇게 친밀했던 적은 아직 없었다. “제정신이에요?” 온나연은 몸을 비틀어 그를 밀쳐내고 되받아 그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그리고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어제 먹은 약 아직 덜 빠졌죠? 거기가 그렇게 가려우면 깔창으로 탁탁 때려요!” “욕심내다가 내빼는 척이야?” 여경민은 터진 입가를 훔치며 음울한 눈빛으로 코웃음 쳤다. “전에 네가 이걸 제일 원했잖아. 지금 줬더니 또 뭐가 불만이야?” “그때는 제가 정신이 나갔고, 눈이 멀었고, 심지어 마음도 멀었어요. 이제는 생각을 바꿨어요. 더는 매달리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제발 선 좀 지켜요.” 온나연은 여희수가 보는 것도 잊은 듯 억눌린 감정을 멈추지 못했다. 예전에는 부부 관계를 돌이켜 보려 무던히 애를 썼다. 그를 위해 섹시한 잠옷도 입어 보고, 촛불도 밝혀 보고, 어젯밤 판클럽에서 배운 뜨거운 폴댄스도 그의 흥미를 되살리려 애써 배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날아가 버렸다. 그녀가 아무리 다채롭고 능숙해 봤자 돌아오는 건 그의 혐오뿐이었다. 그러니 지금 느닷없는 열기는 그녀에게 이혼 직전 영향력을 확인당하는 모멸감으로만 느껴졌다. 역겨울 정도로 더러웠다. “생각을 바꿨어?” 여경민은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 본래 예민한 성격은 그녀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또다시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갑자기 왜? 밖에 다른 남자 생겼어?” “네?” 온나연은 모욕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그의 뺨을 또 치려 했다. 외도는 그가 밥 먹듯 해 왔다. 한밤중에 그녀가 그의 애인들에게 콘돔을 배달해 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무슨 낯짝으로 이런 걸 캐묻나? 그런데 머릿속에 어젯밤 호텔에서 잘생긴 연하남과 뜨겁게 키스하던 장면이 번쩍 떠올랐다. 그녀의 가슴이 순간 움찔했고 눈빛이 흔들렸다. “당신이 이 문제를 물을 자격은... 없어요.” 어젯밤, 마지막 선을 넘었는지는 그녀도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낯선 남자와 호텔에서 밤을 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가 배운 가치관에서는 외도와 다를 바 없었다. 여경민이 지난 몇 년 동안 만난 여자가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배운 윤리 앞에서 스스로 더러워졌다고 느끼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결혼은 감정으로도 이성으로도 유지가 불가능했다. 반드시 끝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불안할 것이며 행복과는 멀어질 것이다. “하. 말투 보니 진짜 있네?” 여경민은 그녀를 노려봤다. 마치 원수라도 되는 듯 말이다. 한때 소중히 아꼈던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그래, 너라면 다른 사람 있어도 이상할 거 없지.” 그는 그녀의 손을 냉정하게 털어 내고 일어서서 나가려 했다. 그때 주미연이 여정훈을 데리고 들어왔다. “형, 하늘이 도왔네. 마침 집에 있었구나. 내가 할 말이...” 여정훈은 불도저처럼 몰아치다가 온나연까지 방에 있는 걸 보고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고는 비아냥거렸다. “어, 형수도 있었네. 어젯밤에 몸을 너무 갈아 넣어서 오늘은 못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여경민은 즉각 이상한 냄새를 맡고 차갑게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무슨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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