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박태윤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는 동생 박수찬의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급해. 진짜 급한 일이야! 가희가 손이 서툴러서 엄마 생신 연회를 준비하다가 엄마 불상 하나를 깨뜨렸어. 이거 엄마한테 들키면 가희는 진짜 죽어. 나 지금 해외야. 새로 알게 된 모델이랑 바닷가에서 놀고 있어서 당장 못 돌아가. 형이 좀 막아 줘.”
박수찬은 숨도 안 쉬고 말을 이어 갔다.
“형이 늘 말하는 그 규칙이니 뭐니, 그런 거 어기는 거 아는 건 아는데... 그래도 가희는 내 아내잖아. 내 일인데 형은 모른 척할 거야?”
박태윤은 미간을 단단히 찌푸렸다. 목소리에는 차가운 기운이 실렸다.
“결혼했으면 왜 지킬 건 안 지키는 거야? 네 여자 일은 네가 돌아와서 막아.”
“에이, 형도 참... 나 원래 그런 사람인 거 알잖아. 솔직히 처음에는 가희가 가난하긴 해도 새하얗고 깨끗해 보여서 신선하니까 결혼한 거지. 근데 같이 살다 보니 금방 질리더라. 문서아 같은 타입은 다르지. 예쁘기도 예쁘고 성격도 거칠어서 자극이 있잖아. 조가희는 오래 보면 너무 밋밋하고 답답해. 보기만 해도 짜증 나. 요즘은 툭하면 전화해서 울고불고하는데, 듣는 나도 미칠 것 같아. 휴가 기분 다 망친다고.”
조가희가 전화해서 운다는 말이 나오자, 박태윤의 눈빛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박태윤은 감정이 읽히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내가 처리할게.”
박태윤은 전화를 끊고 곧장 사무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가희의 일에 마음이 쏠려 있었던 탓에 문틈 밖에 서 있던 문서아의 창백한 얼굴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문서아는 박태윤이 급히 멀어져 가는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 박태윤이 뒤따라오는 최현우 비서실장에게 낮게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서아가 지금 어디 있는지 확인해.”
그러자 최현우가 바로 보고했다.
“박 대표님,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문서아 씨가... 시험관 시술 전 검사 진행을 거부하고 병원에서 빠져나오셨습니다.”
박태윤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무심하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사람 보내서 병원 쪽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
최현우가 잠깐 멈칫했다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박 대표님, 말씀은... 병원 난동을 문서아 씨의 탓으로 전부 돌린 다음, 어르신께 보고해서 분노를 문서아 씨에게 옮기라는 뜻입니까?”
박태윤은 옆얼굴 선이 얼음처럼 딱딱했다. 목소리에도 파문 하나 없었다.
“그래. 크게 터뜨려... 어머니의 관심이 조가희가 불상 깨뜨린 일에서 완전히 떨어지게.”
문서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것 같았다.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차가운 기운이 치고 올라와 그대로 얼음물 속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박태윤이 문서아를 찾는 이유는 문서아가 괜찮은지 확인하려는 게 아니었다. 조가희를 살리려고 문서아를 죄인으로 만들려는 거였다. 임정숙의 분노를 문서아에게 몽땅 씌우려는 거였다.
‘더 뭘 묻고, 더 뭘 확인해야 하겠어.’
진실은 이미 눈앞에 있었다. 너무 노골적이고 잔인해서, 스스로 속일 틈조차 남겨 주지 않았다.
문서아의 심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속이 찢기는 듯 아팠고, 목구멍 안쪽으로 피비린내 같은 통증이 따라붙었다.
문서아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 박태윤이 이미 사라진 뒤였다.
문서아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칠게 손등으로 얼굴을 훔쳐,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냈다.
문서아는 붙잡을 줄도 알지만, 놓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문서아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을 이용하는 남자 때문에 눈물을 흘릴 생각은 없었다.
문서아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문진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문진화, 나 박태윤이랑 이혼할 거야. 당신 인맥이랑 관계 전부 동원해. 최대한 빨리 이혼 증명서 받아 오게 해.”
전화 너머에서 문진화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더니, 이내 폭발하듯 소리를 질렀다.
“너 또 무슨 헛소리를 해! 박태윤이 뭐가 부족해? 듬직하고 능력 있지... 박씨 가문은 최상위 가문이야. 다들 들어가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곳이야. 넌 좀 멋대로 결정하고 난리 치는 버릇 좀 고쳐!”
“아버지한테 조언을 구하는 거 아니에요.”
문서아가 날카롭게 문진화의 말을 끊어 냈다.
“아버지는 제가 멀리 꺼져 주길 바라잖아요. 그래야 아버지랑 그 여자, 그리고 아버지가 숨겨 둔 자식들이 편하게 가족 놀이하면서 살 테니까요.”
문서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목 끝으로 치밀어 오르는 떨림을 억지로 눌러 삼키고, 또박또박 말했다.
“이혼만 처리해 주면 저 바로 남성시에서 사라질게요. 평생 다시는 당신들 앞에 안 나타날 거예요. 눈엣가시가 되지도 않을게요.”
전화기 너머는 한참 동안 조용했다.
문서아는 휴대전화를 쥔 손끝이 얼어붙는 걸 느끼며, 문진화의 성정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다.
문진화 곁의 여자와 숨겨 둔 자식들은 해마다 바뀌어도 끊긴 적이 없었다. 반면 문서아는 맏딸이라는 이름만 달고, 그 집에서 오래전부터 치워야 할 장애물 취급을 받아 왔다.
‘서아가 세상 무서운 게 없이 날뛰던 모습은 전부 본모습이었을까. 아니면 삼켜지지 않으려고 세운 가시였을까.’
끝내 문진화는 마침내 한숨을 내쉬며, 오히려 홀가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네가 그렇게까지 고집한다면 해 주지. 대신 네가 한 약속은 꼭 지켜.”
그 순간 문서아의 가슴이 바늘 수천 개에 동시에 찔린 듯했다. 촘촘한 통증이 온몸으로 번졌다.
문서아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보려 했지만, 웃음은 끝내 웃음이 되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그 사람들 보면... 역겨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