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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나는 한때는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가장 완벽한 모습이 바로 박훈처럼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확신했다. 서울에서 이름만 대면 알던 재벌가의 딸이었던 내가 사생활 사진이 퍼지며 모두의 경멸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박훈은 단 한 번도 물러서지 않고 항상 내 편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대중 앞에서 당당하게 나에게 청혼했다는 사실을 공포했다. 하지만 우연히 들은 그와 부하의 대화를 통해 내가 믿어온 모든 것들이 거짓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박훈이 끝까지 사랑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여동생 심영지였다. “박 대표님, 지시하신 대로 사람들을 붙여 심하영 씨를 겁주고 압박했어요. 이번 일로 충격이 상당해서 앞으로 꽤 오랫동안은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 같아요. 심영지 씨의 앞길에 방해가 될 일도 없을 거고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왜 굳이 사진까지 퍼뜨리라고 하셨어요? 이건... 너무 가혹하지 않아요?” 박훈은 손목의 염주를 천천히 굴리며 차갑게 웃었다. “내가 원하는 건 심하영이 활동을 잠시 중단하는 게 아니라 평생 다시는 무대에 설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하는 거야. 그래야 영지가 안심하니까. 물론 나도 그렇게까지 매정한 인간은 아니야. 나와 결혼해서 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다면 평생 먹고사는 걱정 없이 살 수 있어. 그 정도면 충분한 보상이지.” 부하는 쉽게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대표님은 심영지 씨를 이렇게 사랑하시면서 아무 감정도 없는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실 수 있어요?” 박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사랑하니까 더더욱 가두고 싶지 않은 거야. 영지는 새처럼 더 멀리 날아야 해.” 문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던 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박훈의 말들이 날 선 칼날이 되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끔찍한 악몽 같은 일을 겪은 뒤 나는 박훈이야말로 내 인생을 구원해 줄 사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가 바로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와 아무런 접촉도 없더니 한 달 전 갑자기 다정하게 굴기 시작한 이유가 이거였어. 늘 심영지를 세심하게 챙겼지만 정작 십 년 동안 짝사랑해 온 사람은 나라고 말했던 이유는 심영지를 위해서였어.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됐어.’ 속이 심하게 울렁거려 나는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 앞에서 정신없이 토해냈다. 위 속에 남은 것을 다 비워낸 뒤에야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붙잡았다. 나는 놀라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박훈이 서 있었다. 한때는 이 넓고 단단한 손이 나에게 온기와 안도감을 안겨주었지만 지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 손목을 감싸 쥔 것이 사람의 손이 아니라 마치 차갑고 비늘이 번뜩이는 뱀의 꼬리처럼 느껴졌다. 박훈은 손수건을 꺼내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고 흐트러진 머리카락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주었다. 겉보기에는 한없이 다정했다. “하영아, 또 그때 일이 떠올랐어? 이렇게 집에만 있는 건 좋지 않아. 기분 전환도 할 겸 나랑 경매회에 갈래?” 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그 사건 이후 나를 누구보다 아끼던 아빠는 나를 가문의 수치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박훈이 청혼했을 때 아빠는 마치 쓰레기를 내다 버리듯 나를 그에게 떠밀어 넘겼다. 나한테는 더 이상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박훈과 함께 경매회장으로 향했다. 경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익숙한 수군거림이 나를 집어삼켰다. “어머, 저 사람 심씨 가문의 큰딸 아니야? 사생활 사진이 그렇게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뻔뻔하게 여기에 나와?” “그러게 말이야.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난다고 피해자라고는 하지만 저런 차림으로 무대에서 남자들이랑 붙어 다니는데 멀쩡하겠어? 난 그런 일이 벌어진 것도 전부 자업자득이라고 봐.” “꼭 누구한테 강제로 당한 게 아닐 수도 있어. 그냥 한순간 선을 넘은 걸지도 몰라.” 숨이 턱 막힌 듯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고 손끝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말했다. “훈이 오빠, 나 집에 가고 싶어요.” 하지만 내 손은 박훈의 손에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는 부드러운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하영아, 내가 옆에 있는데 뭐가 무서워? 내가 지켜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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