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성지태는 침대 옆에 서서 심민지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이마를 만져봤다.
열 때문에 정신이 몽롱했던 심민지는 옆에 누군가 있음을 느끼자마자 그 온기를 붙잡았다. 성지태가 힘껏 뿌리쳐도 놓지 않아 결국 껴안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가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제는 날 그렇게 밀어내더니 이젠 또 달라붙네?”
문득 그녀와 처음 잠자리를 가졌을 때 그녀가 밤새도록 꽉 껴안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성지태는 반듯하게 누워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평소 심민지는 낮잠 자는 습관이 없었다. 열이 내려가자마자 바로 잠에서 깼다. 그러다가 성지태를 껴안고 잤다는 걸 알아채고는 벌떡 일어났다.
성지태를 껴안고 잔 충격에 벗어나기 전에 그녀는 황급히 장부를 찾았다. 윤예나가 없는 틈을 타 장부를 성지태에게 내밀었다.
“대표님, 이젠 사인해주실 수 있겠어요?”
심민지가 깨어나자마자 고마움도 모르고 매정하게 나오는 모습에 성지태는 분노가 타올랐다.
“그렇게 오래 껴안았으면서 또 대표님이라 불러?”
그녀는 대꾸하지 않고 장부를 내민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성지태는 심민지가 든 장부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볼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인해줄 수는 있어. 하지만 그 전에 내 여자가 될 건지부터 대답해.”
그녀는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성지태는 여전히 그녀를 농락하려 했고 그렇게 괴롭혔는데도 아직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제가 싫다고 하면요?”
성지태가 소파에 팔을 올려놓고 말했다.
“그럼 내 기분이 아주 나쁘겠지.”
다시 말해 그녀가 거절하면 이 일을 잃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일을 잃는 것과 성지태의 밑에서 애걸하며 무릎을 꿇고 사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일을 잃는 쪽을 택할 것이다.
일자리를 잃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지만 성지태의 옆에서는 무조건 살 수 없을 것이다. 이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어느 쪽이 사망 확률이 더 높은지를 고르는 문제였다.
“죄송한데 저 남자친구 있어요.”
어차피 성지태가 이곳에 오래 머물 것도 아니니 거짓말로 둘러대서 그를 떼어내면 그만이었다. 성지태도 그저 잠시 놀고 싶을 뿐이라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에게 별 흥미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성지태가 벌렸던 팔을 거두더니 위험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방금 뭐라고 했어?”
“남자친구가 있다고요. 대표님의 잠자리 파트너를 할 수 없으니 다른 분을 알아보세요.”
‘남자친구가 있는데 내 잠옷 속으로 파고들어서 끌어안았어? 남자친구가 있는데 키스하는 동안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고? 게다가 잘 때도 날 껴안았어. 여전하구나, 너. 남자친구가 있으면서 다른 남자를 만나는 버릇을 수년이 지나도 고치지 못했다니.’
성지태가 갑자기 앞으로 다가오더니 심민지의 목을 움켜쥐었다.
“심민지, 넌 여전히 상스럽구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심민지는 발버둥 치며 그의 손가락을 떼어냈다.
“이거 놔요.”
성지태의 목소리가 지옥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어두웠다.
“심민지, 너만 보면 역겨워.”
그러고는 그녀를 거칠게 밀쳐냈다.
“꺼져...”
심민지가 심하게 기침했다. 질식할 것 같은 공포감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성지태의 태도가 순식간에 확 바뀌었다. 심민지는 허둥지둥 장부를 챙긴 다음 도망치듯 가버렸다.
그런데 문을 연 순간 문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휴대폰 카메라가 그녀를 향해 있었다.
“생일 축하...”
사람들은 고개를 들다가 멈칫했다. 성신 그룹 직원, 호텔 직원, 그리고 성지태의 친구 정우빈과 서현우까지 모두 있었다.
수많은 눈동자가 그녀를 심판하듯 쏘아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결국 윤예나를 쳐다봤다.
윤예나가 케이크를 들고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떨굴 것만 같았다. 옆 사람이 부축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쓰러졌을 것이다.
케이크 위에 이런 글씨가 쓰여 있었다.
[지태야, 생일 축하해.]
그녀가 눈물을 왈칵 쏟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내가 잘못 봤을 거야. 심민지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어.”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예나 씨 너무 안 됐어. 좋아하는 사람 생일 축하해주려고 사람들 다 모았는데 이렇게 배신을 당하다니.”
“저 여자 이번 회의 담당 영업 직원이 아닌 것 같은데? 남의 약혼자를 꼬시려고 온 게 틀림없어.”
“예나 씨가 성 대표님 약혼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 그런데도 꼬리 치러 오다니.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는 여자야.”
“우리 성신 그룹이 연말 행사를 하러 이 호텔이 왔는데 호텔 직원이라는 사람이 남의 회사 대표를 꼬시다니. 참 재미있는 일이야.”
성신 그룹 사람들이 호텔을 헐뜯는 걸 본 호텔 직원들이 나서서 설명했다.
“직원의 개인적인 문제로 호텔 전체를 끌어들이지 마세요. 업무 얘기 중이었을 수도 있잖아요.”
“심민지가 이 회의 담당도 아닌데 대표님께 무슨 업무 얘기를 해요? 게다가 우리 여기서 30분이나 있었어요. 무슨 얘기를 방 안에서 30분이나 해요?”
...
여기저기서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만 마리의 벌이 머리를 쏘는 것처럼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심민지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 가장 감당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가 뭐라 해명하려 했으나 수많은 시선이 그녀를 향해 있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가 묻히고 말았다.
‘아 참, 장부.’
심민지는 다급하게 장부를 꺼내 변석주를 쳐다봤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게 아니라 여러분 오해하셨어요. 전 대표님의 사인을 받으러 왔을 뿐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긴 했지만 그래도 들은 사람이 있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조금 줄어들었다.
변석주는 부하 직원을 감싸는 스타일이었다. 직원이 실수했더라도 일단 문제를 수습하고 나중에 개인적으로 혼냈다.
변석주가 앞으로 나서더니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아무래도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윤예나의 기분을 풀어주려 애썼다.
“윤예나 씨, 오해하셨어요. 제가 민지 씨한테 대표님의 사인을 받아오라고 시켰어요.”
도희라는 평소 심민지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하지만 성신 그룹 행사 담당자가 그녀인지라 대신 심부름해준 심민지를 돕는 게 도리였다. 그녀도 나서서 설명했다.
“네, 맞아요. 귀사 마케팅 총괄님께서 대표님이 호텔에 계시니 대표님께 직접 사인을 받으라고 하셨어요. 오늘 제가 너무 바빠서 민지 씨한테 부탁한 거고요.”
변석주와 도희라가 나서서 해명하자 비난의 목소리도 조금 잦아들었다. 하지만 윤예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오직 자신의 세계에만 빠져있었다.
심민지가 윤예나에게 말을 건넸다.
“예나 씨, 전 공적인 일 때문에 대표님을 찾아온 겁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대표님께 사인받아야 할 장부 여기...”
그런데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예나가 들고 있던 케이크를 떨어뜨리더니 뒷걸음질 치면서 큰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심민지 씨, 예전에 하던 그 일 그만두지 않았어요? 왜 아직도 이런 짓을 하고 다녀요?”
그 말이 별장 전체에 메아리쳤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심민지 예전에 불륜녀였어?”
“상습범이네, 아주...”
“그 일이라면 혹시 몸 파는 일을 말하는 거야?”
그 뒤의 말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민지의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들고 있던 장부들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녀의 안색이 핏기없이 창백해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장부들이 이젠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성지태를 유혹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윤예나가 그 일을 그만두지 않았냐는 말을 내뱉은 순간 심민지의 미래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호텔은 규율이 엄격했기에 분명 그녀의 과거를 조사할 것이다.
과거를 조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전과가 있는 사람을 조사할 경우 다른 사람을 찾을 필요도 없이 경찰 기록만 조회하면 금방 드러났다.
그동안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낸 터라 호텔 측에서 굳이 직원의 과거를 파헤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규모 있는 호텔이라면 직원이 아무리 일을 잘해도 전과자는 절대 고용하지 않는다. 심민지처럼 더러운 전과가 있는 사람은 더더욱 고용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호텔은 그녀의 전과를 빌미로 아무런 보상 없이 해고할 것이다.
심민지는 절망적인 눈빛으로 변석주를 쳐다봤다. 변석주의 두 눈에 아직 그녀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었다. 심지어 평소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던 도희라조차 필사적으로 장부를 주우며 심민지의 해명을 기다렸다.
그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온몸의 피가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세상이 온통 암흑으로 변했다.
심민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성지태는 문에 기댄 채 그녀가 사람들의 뭇매를 맞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게 바로 성지태가 말했던 기분이 아주 나쁠 거라는 상황이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불쾌해지면 심민지는 지옥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