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다행히 윤예나가 평소 현모양처 이미지를 고수하고 있었기에 자진해서 말했다.
“내가 내려가서 화상 연고 좀 찾아볼게.”
윤예나가 내려가자마자 심민지는 성지태의 잠옷 가운 속에서 황급히 빠져나왔다. 도망칠 틈을 찾으려던 그때 성지태가 갑자기 그녀의 목을 잡았다.
“지금 나 유혹하는 거야?”
심민지가 반박하기도 전에 성지태가 그녀의 턱을 잡고 살짝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입을 맞췄다.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얘졌다. 성지태는 그녀가 저항하지 않자 키스를 더 깊게 이어가려 했다.
익숙한 감촉, 익숙한 냄새였다.
이 느낌은 수년이 지난 것처럼 어색하면서도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이 스킨십으로 마음이 서서히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성지태는 다른 손으로 심민지의 등을 더듬으며 그녀를 품에 단단히 가두었다. 부드러운 살결과 익숙한 냄새에 그는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심민지가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때 윤예나의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바 테이블 쪽으로 밀어붙인 채 키스를 계속 이어갔다.
윤예나에게 들킬까 봐 두려웠던 심민지는 성지태를 세게 밀어내지도 못하고 그가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윤예나가 시선을 돌리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갔지?”
그녀의 목소리에 심민지는 긴장한 나머지 온몸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성지태는 윤예나가 볼까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이 아슬아슬한 밀회를 즐기는 듯했다.
‘이것이 이 사람이 말한 잠자리 파트너겠지?’
그는 약혼자에게 발각되기 직전의 그 짜릿함을 즐겼다.
심민지는 옛날 시대의 첩보다도 못했다. 성지태에게 그녀는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노리개에 불과했기에 그가 원하면 언제든지 키스할 수 있었다.
윤예나의 발소리가 바 테이블 쪽으로 다시 가까워지는 걸 들은 심민지는 다급하게 성지태의 가슴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을 즐기면서 더욱 거칠게 키스했고 그녀가 들이마신 산소까지 전부 빨아들이려 했다.
궁지에 몰린 심민지가 그의 입술을 세게 물어버리자 성지태는 밀려온 고통에 숨을 들이켰다. 그의 두 눈에 소유욕이 가득했다.
오랜만의 스킨십에 성지태는 피가 끓어올랐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심민지의 붉게 부어오른 입술을 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윤예나가 바 테이블 안쪽으로 들어오기 직전 능청스럽게 말했다.
“커피 찾고 있었어.”
윤예나는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바 테이블의 반대편에 앉았다. 심민지는 온몸의 털이 다 곤두설 정도로 크게 놀랐다.
성지태가 커피를 가지러 가는 틈을 타 재빨리 바 테이블 아래의 좁은 공간으로 몸을 숨겼다.
그는 여유롭게 커피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기분이 좋은 듯 물 붓는 횟수를 소리 내 세기까지 했다.
그때 윤예나가 갑자기 소리쳤다.
“지태야, 입술이 왜 그래?”
성지태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오더니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살짝 만졌다.
“별거 아니야. 어떤 고양이가 물었어.”
윤예나의 설레던 마음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몇 년 동안 지태 옆에 여자라곤 없었는데 이 호텔에 오자마자 고양이가 생겼다니. 그 고양이가 심민지일까?’
커피를 내린 후 성지태는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심민지는 윤예나가 이미 그 고양이의 정체를 좁혀가고 있음을 알아챘다. 만약 지금 이 자리에 심민지가 있다는 사실을 윤예나가 알게 된다면 얼마나 큰 증오심을 품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약혼녀의 영역에서 설쳐대는데 어느 약혼녀가 참을 수 있겠는가?
성지태는 윤예나를 내보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녀와 계속 대화를 나누었는데 일 얘기부터 시작하여 일상 얘기까지, 현재부터 어린 시절까지 얘기가 이어졌다.
다행히 오늘은 대화만 할 뿐 잠자리는 하지 않았다. 했더라면 심민지가 얼마나 난처했을까?
오늘 가뜩이나 몸이 좋지 않은데 이렇게 좁은 곳에 웅크리고 있으니 더 나빠졌다. 머리가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두 시간 동안 버틴 게 헛수고가 될 수 있으니까.
심민지는 자세를 바꿔 계속 웅크렸다. 너무 어지러워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의식을 잃고 말았다.
성지태도 바 테이블 밑의 심민지가 잠든 걸 알아챘다.
“예나야, 오늘 회의는 나 빼고 진행하고 네가 가서 잘 지켜봐.”
일에 있어서 윤예나는 결코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윤예나가 떠난 후 성지태는 쪼그리고 앉아 심민지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얼굴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눈빛과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깨어있을 때는 노예 같은 얼굴이었는데 잠든 모습은 그래도 보기에 훨씬 편안했다.
성지태는 몸을 굽혀 심민지를 안아 올렸다. 그런데 안자마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황급히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보니 역시나 열이 나고 있었다.
어제 끝까지 참는 모습을 보고 멀쩡할 줄 알았는데 결국은 열이 나고 말았다.
성지태가 소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사 불러. 여기 아픈 사람 있어.”
그때 심민지의 전화가 울렸다. 전화벨 소리에 심민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벨 소리에 좋지 않은 기억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성지태는 망설임 없이 심민지의 전화를 끊어버렸다.
‘참 일복이 터졌어. 벨 소리에 아무리 피곤해도 일어나려 하다니.’
그는 그녀의 휴대폰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한편 성신 그룹의 마지막 회의장.
변석주는 회의 상황을 잠시 지켜보다가 심민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첫 번째 걸었을 때 전화가 끊겨 다시 걸었더니 그 뒤로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
회의장을 둘러보던 도희라는 성지태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걸 발견했다.
그녀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부장님, 민지 씨가 해결했대요? 성신 그룹에서 벌써 몇 명이 체크아웃하고 떠났어요. 만약 잔금을 못 받으면 어떡해요?”
변석주는 뭔가 골똘히 생각했다. 심민지와 2년 넘게 일하면서 휴대폰을 끈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희라 씨, 성신 그룹 마케팅 총괄이 저쪽에 있으니까 가서 성 대표님이 어디 계신지 조용히 물어봐 줘.”
도희라는 살금살금 걸어갔다가 잠시 후 돌아왔다.
“부장님, 대표님 오늘 아침부터 계속 별장에만 계셨고 한 번도 나오지 않으셨대요.”
변석주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민지 씨가 아침 일찍 대표님 찾으러 갔는데 아직도 안 돌아왔어. 별장에 있다면 분명 만났을 텐데.”
변석주의 목소리가 매우 낮았는데도 윤예나는 심민지와 성지태의 이름을 정확히 듣고 즉시 경계 태세를 갖췄다.
성지태는 오늘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평소 놀기 좋아하는 그가 밖에 나가지 않은 게 너무나 이상했다.
만약 심민지가 아침 일찍 성지태를 찾아갔다면 윤예나가 별장에 갔을 때 심민지도 별장에 있었을 것이다. 성지태가 별장에서 보인 이상한 행동, 그리고 터진 그의 입술...
심민지가 지금까지 별장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윤예나는 곧바로 별장으로 향했다. 별장 앞에 도착했을 때 의사와 함께 들어가는 소준혁을 봤다.
그녀가 들어가려 하자 성지태의 경호원이 그녀를 막아섰다.
“윤예나 씨, 지금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윤예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감히 나를 막아?”
성지태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녀를 막은 적이 없었다. 사적인 곳도 성지태는 그녀를 들어오게 했었다.
그런데 지금 막다니...
윤예나의 지위를 잘 아는 경호원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께서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특별히 지시하셨거든요.”
윤예나는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마음속에 늘 불안하게 자리 잡고 있던 비밀이 꿈틀거렸다.
수년 동안 성지태의 주변에 어떤 여자가 나타나든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유독 심민지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만약 아픈 사람이 여자라면 분명 심민지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잠시 후 소준혁이 의사와 함께 별장 밖으로 나왔다.
“소 비서님, 지태 어디 아파요?”
소준혁은 윤예나를 보고 잠시 흠칫했으나 이내 질문에 대답했다.
“네, 감기에 걸렸어요.”
성지태의 상처를 치료하러 왔다면 믿었겠지만 한 시간 전에 헤어졌는데 한 시간 만에 감기에 걸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좀비 바이러스도 이보다 감염이 빠르지 않을 것이다.
윤예나는 멍한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가 멀리 있는 성지태의 별장 입구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