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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성지태는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 심민지를 쳐다보았다. 심민지는 오늘 하얀색 셔츠에 남색 펜슬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정우빈이 심민지가 섹시하다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심플한 오피스룩인데도 역광 때문에 몸매가 더욱 두드러졌고 완벽한 라인은 성지태의 상상력을 마구 자극했다. 그는 이 여자를 진심으로 싫어했지만 몸매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잠시 팽팽하게 대치했다. 성지태는 심민지가 내민 장부를 받지 않고 가까이 오라는 손짓만 했다. 지금 잠옷 가운만 걸치고 있어 단단한 가슴 근육이 보일 듯 말 듯했다. 이런 옷차림으로 이곳에서 공적인 일을 논하기엔 부적절했다. 성지태에게 약혼녀가 있었던 터라 심민지가 방 안으로 들어가는 건 실례였다. 이따가 윤예나가 돌아와 오해하기라도 하면 곤란해질 것이다. 윤예나가 겉으로는 얌전하고 착한 것 같아도 사실은 누구보다 독한 수단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 사람을 처리할 때 절대로 직접 나서지 않았다. 몇 마디 말로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능력을 지녔다. 심민지가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자 성지태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시 팽팽한 대치가 이어졌다. 방을 가로지르는 바람에 성지태의 가운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지만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끝까지 버티겠다는 심산인 듯했다. 심민지는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장부를 내밀었다. 성지태는 장부를 받지 않고 관자놀이를 주무르면서 그녀를 쳐다봤다. “원래부터 노예근성이 있었어? 아니면 몇 년 사이에 배운 거야? 대학교 때 내 앞에서 보였던 그 오만함은 다 연기였어?”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장부를 꽉 움켜쥐었다. “먹고 살아야 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성지태가 가볍게 말했다. “돈이 부족했어? 돈이 그렇게 좋아?” 부족해도 너무 많이 부족했다.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여기서 그에게 빌 만큼.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요?” 성지태가 카드 한 장을 꺼내더니 그녀에게 휙 던졌다. “이 카드 이제부터 네 것이야.” 명확히 말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스폰서가 되거나 돈으로 사겠다는 의미라는 걸 심민지는 알아챘다. 성지태가 이미 모욕할 만큼 다 모욕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전에는 말로만 모욕했지만 이젠 돈으로 심민지의 자존심을 사려 했다. 심민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애인이 돼 달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러자 성지태가 경멸하듯 비웃었다. “그럴 리가. 그냥 잠자리 파트너 정도야.” 그 말에 심민지는 너무도 화가 나 온몸을 파르르 떨었고 참고 있던 눈물이 결국 터져 나왔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성지태는 잠시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순식간에 사라졌다. “예전에 몸을 판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 성지태는 항상 그녀의 심장에 정확히 칼을 꽂는 법과 자존심을 짓밟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심민지가 카드를 집어 성지태의 얼굴에 던지려던 그때 아래층에서 윤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태야, 내가 과일 깎았는데 내려와서 좀 먹어.”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졌다. 성지태가 이미 심민지의 자존심을 짓밟아버렸다. 거기에 유부남에게 꼬리 친 내연녀라는 누명까지 쓰고 싶지 않았다. 만약 윤예나가 그녀를 유부남을 꼬신 내연녀라고 소문이라도 낸다면 전과 사실이 드러나지 않더라도 호텔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성지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윤예나의 목소리에 곧바로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방에 가져다줘.” 심민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으로 부르신다고요? 제가 여기 있는 걸 약혼자분이 보면 뭐라고 설명하실 건데요?” 성지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방 구조를 훑어보던 심민지는 어쩔 수 없이 바 테이블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가 숨자마자 윤예나가 올라왔다. 성지태는 잠옷 가운을 정돈하고 소파에 앉았다. 윤예나가 과일 접시를 티 테이블 위에 놓더니 통유리창을 닫은 다음 안주인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어제 비가 와서 벌레가 많아. 아무리 5성급 호텔이라 해도 벌레를 모두 박멸할 수 없으니까 창문은 열지 마.” 성지태가 짧게 대답했다. “응.” 그녀는 창문을 닫고 성지태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떠나는데 오늘 나가서 구경 좀 할래? 모처럼 나왔는데 기분 전환이라도 해야지.” 나가자는 소리에 심민지는 속으로 기뻐했다. 그런데 성지태가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냥 호텔에 있을래.” 성지태가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었다. 윤예나가 심민지의 존재를 알기를 원치 않았다면 지금 당장 윤예나를 데리고 나갔어야 했다. 성지태에게 윤예나는 ‘자격 있는 정실부인’이었다. 정실부인은 남편이 밖에서 바람을 피우는 것을 용인해야 했다. 그리고 성지태가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면 윤예나가 그 여자를 처리하며 쾌감을 얻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그들이 사는 방식일 것이다. 끼리끼리니까 약혼하는 게 아닐까? “그럼 나도 호텔에 있을게. 커피 마실래? 한잔 타줄게.” 바 테이블 뒤에 숨어 있던 심민지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바 뒤는 이제 도망칠 곳이 없었다. 심민지는 다가올 굴욕을 예상하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성지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앉아 있어. 내가 할게.” 윤예나의 눈이 반짝이더니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목소리에 설렘이 가득 묻어 있었다. “고마워.” 윤예나는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성지태를 쳐다봤다. 평소에는 늘 그녀가 성지태를 챙겼다. 그가 먼저 그녀를 챙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수년 동안 성지태가 유일하게 시중을 들다시피 잘해줬던 여자는 심민지뿐이었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성지태는 바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 구석에 숨어 있는 심민지를 도발적으로 내려다봤다. 가뜩이나 공간이 좁은데 성지태까지 들어오니 산소마저 희박해지는 것 같았다. “진하게 탈까, 연하게 탈까?” 윤예나가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연하게.” 그는 고개를 숙여 서랍에서 커피를 꺼냈다. 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와 피하고 싶었으나 심민지는 피할 곳이 없었다. 그녀는 도톰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겁에 질린 토끼처럼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심민지의 신경은 온통 윤예나의 발걸음에 쏠려 있었다. 그녀의 발소리가 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만약 윤예나가 바 쪽으로 다가온다면 목만 내밀어도 심민지의 모습을 볼 수 있을 터.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심민지는 성지태의 넉넉한 잠옷 가운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성지태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방금 끓인 뜨거운 물에 실수로 손을 데고 말았다. 옷 속에 숨은 심민지는 마치 새끼 고양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예전에 심민지의 몸을 탐색한 적이 있었던 터라 그녀가 조금만 가까이해도 성지태는 통제 불능 상태가 돼버렸다. 윤예나가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왜 이렇게 덜렁대? 손 뎄잖아.” 심민지는 성지태의 몸이 점점 더 뻣뻣해지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윤예나의 말이 성지태에게는 걱정처럼 들리겠지만 심민지는 너무나 두렵기만 했다. 그녀는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두 손으로 허벅지를 꽉 끌어안았다. 성지태가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윤예나가 그녀를 보게 될 테니까. 성지태가 붉어진 손을 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어떡하지? 빨갛게 됐네.” 그 말 속에 미묘한 협박이 담겨 있었다. 심민지는 성지태의 다리를 더욱 세게 붙잡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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