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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일이 벌어졌다. 막 병원 정문 앞에 발을 디디는 순간, 코를 찌르는 에테르 냄새가 확 덮쳐 오더니 누군가 신유리의 입과 코를 거칠게 틀어막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신유리는 폐공장에 결박된 채였다. 바로 옆에는 허지연도 같은 꼴로 묶여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선 납치범 무리를 보는 순간, 신유리는 숨이 얼어붙었다. 3년 전, 심명준을 납치했던 그놈들이었다. 잠시 뒤 심명준이 사람들을 데리고 급히 들이닥쳤고 얼굴빛은 잿빛으로 굳어 있었다. “둘 다 풀어 줘. 돈이 얼마가 필요하든 다 줄게!” 납치범 우두머리는 손에 든 칼을 느긋하게 굴리며 비웃었다. “심 대표, 3년 전에 네가 우리 소굴을 털어 버렸지. 내 형제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알아? 오늘은 너도 똑같이 맛봐야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잃는 기분이 어떤지.” 그는 신유리와 허지연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둘 중 하나만 골라. 한 명은 데려가. 나머지는...” 우두머리는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심명준의 시선이 두 여자 사이를 흔들렸다. 신유리는 말없이 심명준을 바라봤다. 바람이 헝클어진 머리칼을 젖히며 목 언저리의 채찍 자국을 드러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였다. 반대로 허지연은 이미 울음 범벅이 되어 흐느꼈다. “명준 오빠... 나 좀 살려 줘. 나 너무 무서워.” 심명준의 눈길이 신유리의 평평한 아랫배로 떨어졌다. 잡종이라는 말, 두 줄이 선명히 찍힌 검사 결과지, 낯선 남색 손수건, 며칠 내내 이어진 신유리의 반항과 고집이 전부 심명준의 속을 날카롭게 후벼 팠다. 마침내 심명준이 입을 열었다. “지연이를... 선택할게.” 신유리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웃음이 났다. 3년 전, 신유리는 심명준을 살리겠다고 자기 목숨을 내던졌다. 그런데 3년 뒤, 심명준은 다른 여자 하나를 위해 신유리의 목숨을 버렸다. 긴 악몽 같은 순간이었다. 한때 생명까지 바쳐 사랑했던 남자였지만 이제부터는 신유리가 살아도 죽어도 상관없는 남자였다. 납치범 우두머리가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통쾌하군!” 허지연은 울먹이며 심명준에게 달려들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신유리가 갑자기 온몸에 힘을 실었다. 옆에 붙어 있던 납치범을 어깨로 들이받아 비틀거리게 만들고, 문이 열린 공장 출입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잡아!” 우두머리가 포효했다. 신유리는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귀 옆으로 바람이 울부짖고, 뒤에서는 발소리가 뒤엉켜 쫓아왔다. 짠 냄새가 섞인 바닷바람이 얼굴을 후려쳤다. 끝내 신유리가 멈춰 선 곳은 절벽 끝이었다. 발밑에서 자잘한 돌멩이가 와르르 떨어져 아래의 거센 흰 포말 속으로 사라졌다. “유리야!” 심명준이 사람들을 데리고 절벽까지 따라잡았다. 이곳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심명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3년 전의 장면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때도 신유리는 바로 여기서, 심명준을 구하려고 바다로 떨어졌다. “돌아와!” 심명준이 손을 뻗었다.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약속할게. 아이... 아이는 낳아도 돼. 우리 다시 시작하자. 내가... 내가 내 아이처럼 키울게.” 신유리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피가 묻은 흰 치맛자락이 바닷바람에 펄럭였다. 신유리는 심명준을, 심명준 품에 안긴 허지연을, 그리고 호시탐탐 둘러싼 납치범들을 차례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웃었다. 눈꼬리에서 눈물 한 방울이 천천히 미끄러져 내렸다. “심명준.” 신유리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모두의 귀에 박혔다. “나, 너를 알게 된 것도... 네 곁으로 돌아온 것도 정말 후회해.” 심명준의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굳었다. ‘유리가 후회한다니. 함께한 모든 시간을, 통째로 부정한다니.’ “이제부터 너랑 나는... 아무런 상관없어.” 신유리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심명준의 눈이 공포로 흔들리는 사이, 신유리는 망설임 없이 몸을 뒤로 기울였다. 공중에서 흰 치마가 마지막 곡선을 그리며 펼쳐졌고, 이내 거친 파도가 신유리의 몸을 삼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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