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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막 가라앉았던 마음이 순식간에 형편없이 나빠졌다. 나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연승훈은 더 못 견디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는 손을 뻗어 나를 끌어가려고 했다. 나는 크게 소리쳤다. “만지지 마!” 그 한마디에 진료와 처치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수없이 많은 시선이 나와 연승훈에게 꽂혔다. 다들 구경하겠다는 눈빛이었다. 연승훈의 낯빛이 더 어두워졌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어 협박했다. “따라와. 무슨 말이든 집에 가서 해.” 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크게 말했다. “싫어!” 그의 눈빛이 더 음험해졌다. “유지안, 이제 제법이네? 내가 너를 신경 쓰는 것도 여기까지야.” 인내심의 끝을 알리는 위협적인 어조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신경 안 쓰면 잘되었네. 나도 네 신경 필요 없어.” 연승훈은 다시 나를 잡아끌려고 했지만, 내 어깨의 붕대를 스치자 동작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제야 자신이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는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아까 내가 실수로 너한테 상처를 줬다는 것, 인정해. 네가 화내는 것도 이해해. 그래도 너를 위하려고 한 거야. 얌전히 같이 가자.” 나는 말없이 입꼬리만 비웃듯 올렸다. 그가 한참을 기다렸지만, 내 대답은 없었다. 그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나는 그가 이미 최선의 양보를 했다는 걸 안다. 도주은의 말대로라면, 예전의 나는 그의 사과를 기다리기는커녕 먼저 울먹이며 용서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연승훈은 그때의 습관대로, 내가 스스로 물러서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사랑 앞에서 자존도 없는 예전의 유지안이 아니다. 매질 뒤에 사탕 하나 던져 주는 식의 날들을, 나는 단 하루도 더 살고 싶지 않다. 나의 침묵은 끝내 그를 분노하게 했다. 연승훈이 피식 냉소했다. “좋아, 유지안. 같이 안 가겠다면 네 마음대로 해. 해안시에서 누가 너를 받아 주나 보자!” 나는 담담하게 응수했다. “그건 네가 신경 안 써도 돼.” 그가 불현듯 바짝 다가왔다. 낮고 깊은 음성이 온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유지안, 오늘 부린 오기 두고두고 후회하지 마.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보자.”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끝없이 차가운 무심함만 보였다. ‘이 사람이 내가 그토록 사랑한 남편이라고? 목숨까지 내던져 붙잡으려고 했던 남편?’ 그 순간, 내 심장은 섣달 매서운 한기보다 더 차가워졌다. “연 대표님?” 온화한 목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깨뜨렸다. 연승훈은 영수증을 들고 선 고우빈을 가늘게 눈을 좁혀 바라보았다. 그는 곧 말투를 바꾸어 낮게 말했다. “고 대표님, 웃음거리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집사람 일이 참... 면목이 없네요...” 그의 한숨과 무언의 책망에 간신히 누르고 있던 분노가 터질 뻔했다. 그러나 고우빈이 다가와 담담히 말했다. “연 대표님, 말씀 과하십니다. 지안이는 저에게 여동생이나 다름없어요. 여동생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제가 오빠 노릇을 해야죠.” 이번에는 나뿐만 아니라 연승훈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와 고우빈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나를 가리키며 확신 없는 어조로 물었다. “고 대표님, 유지안을 알아요?” 고우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죠.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알아요.” 연승훈은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우빈의 뒤로 서서, 그가 나와 연승훈 사이를 가로막아 주기를 바랐다. 연승훈이 더 캐묻기 전에 고우빈이 내 손을 잡고 다정히 물었다. “아까 선생님이 네 팔은 절대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어. 그리고 머리 상처는 내일 MRI 더 찍어야 해.” 그가 하나하나 일러 주는 중에 연승훈이 불쑥 끼어들었다. “고 대표님, 유지안한테 속지 마요. 멀쩡한데 연기하는 거예요.” 내가 반박하려는 찰나 고우빈이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봄바람 같던 눈빛이 한순간 기세를 바꾸었다. 주위 공기가 몇 도는 싸늘해진 듯했다. 연승훈은 순간 놀란 뒤, 눈빛이 어두워졌다. 고우빈이 느릿하게 말했다. “지안이는 연 대표님의 아내예요. 다쳤는지 확인하기 전에 먼저 사기꾼 취급부터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연승훈은 고우빈이 나설 줄 몰랐는지 잠깐 멈칫하다가 차게 웃었다. “고 대표님도 나름 이름이 있는 분이시죠. 그런데 왜 제 아내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습니까? 저와 제 아내 일이면, 그건 제 집안일이에요. 고 대표님과는 상관없습니다.” 연승훈은 집안일을 특히 힘주어 말했다. 고우빈이 얇은 입술을 살짝 올리고 안경을 밀었다. “그래요? 분명히 대표님의 집안일이죠. 다만 한 가지만 상기시키고 싶네요. 계 선생님의 진단은 여기 있어요. 속일 수 있는 것이 아니죠. 그리고 지안이 이렇게 크게 다쳤는데, 나중에 지안이 오빠 승기한테 어떻게 설명하시려고요?” 점점 난처해지는 연승훈의 안색을 보더니 고우빈이 한마디를 더 얹었다. “승기가 설사 동생을 받아 주지 않는다 해도, 지안이는 유씨 가문의 유일한 딸입니다.” 연승훈의 얼굴빛이 변했다. 그는 나를 똑바로 보며 한 글자씩 눌렀다. “유지안, 따라와.” 그의 인내가 다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기억을 잃기 전의 나라면, 아마 이쯤에서 고분고분 그를 따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 개 같은 남자에게서 멀어지고 싶다. 더 멀리. 나는 고개를 돌리고 고우빈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오빠, 우리 가자.” 그가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내 팔이 거친 힘에 비틀렸다. 나는 놀라 뒤돌아보았다. 연승훈의 눈빛은 사람을 해치고도 남을 듯 음산했다. 그는 나를 강제로 품 안으로 끌어들인 뒤 허리를 거칠게 눌렀다. 그리고 냉랭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나중에 식사 대접하죠. 또 봐요.” 말을 끝내자 연승훈은 나를 강제로 끌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급히 뒤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영수증을 든 채 제자리에서 서 있는 고우빈만 보였다. 그의 표정은 똑똑히 읽히지 않았지만 어딘가 실망이 스친 듯했다. ... 연승훈이 손을 놓아 준 것은 지하 주차장에 이르러서였다. 손이 풀리자마자, 나는 곧장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그가 낮게 그러나 크게 외쳤다. “유지안, 한 걸음만 더 가면 다리를 분질러 버린다.” 나는 피식 비웃었다. “덕분에 내 팔은 거의 비틀려 나갈 뻔했지. 이제는 다리까지 부러뜨리겠다는 거야?” 나는 다가가 연승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때려. 오늘 안 때리면 넌 개가 되는 거야.” 나는 연승훈이 당장 주먹을 휘두를 줄 알았다. 나 역시 얻어맞을 각오를 했다. 그때,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훈아, 너 어떻게 지안 씨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 나는 얼어붙었다. 연승훈 너머로 그의 차 안에 앉아 있는 진슬기를 보았다. 진슬기는 고요히 차에서 내려 우리 사이로 걸어왔다. 나는 또다시 비웃었다. “대단하시네. 어디든 진슬기를 데리고 다니는 거야?” 그의 얼굴에 잠깐 부자연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그는 변명처럼 한마디 덧붙였다. “슬기가 오늘 극장에서 리허설이 있어. 내가 태워 주는 길이야.” 나는 피식 웃었다. 더 노골적인 조롱이 섞인 웃음이었다. 연승훈이 내 웃음에 다시 격앙되려는 순간, 진슬기가 그의 손을 다정히 잡았다. 그리고 나를 향해 아주 정중하게 말했다. “지안 씨, 사실 제가 승훈이랑 같이 오자고 했어요. 지안 씨가 다쳤다고 해서요. 많이 걱정됐다고요.” 두 사람이 꼭 맞잡은 손을 바라보니,세상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둘 사이가 실제로 어떻든 간에, 내가 18년을 살아온 기억 속에는 내연녀가 남편의 손을 잡고 본처 앞에 나서는 광경은 없었다. ‘이 감정 어린 연출, 나에게 보여 주려고 일부러 준비한 것인가?’ 나는 휴대폰을 꺼내 그들을 향해 찰칵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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