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심가은은 백이현이 주서연의 손을 끼고 다정하게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시선을 거뒀다.
그녀는 곧장 최정희를 찾았지만 주변에 부인들이 둘러싸고 있어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한참 동안 기다린 끝에 틈이 나자 그제야 걸음을 옮겨 준비해 온 선물을 내밀었다.
최정희는 그녀를 보자 눈빛이 복잡해졌다.
“이혼까지 이제 닷새 남았구나. 가은아, 난 네가 정말 아쉬워.”
3년 전 백이현이 다리를 못 쓰게 됐을 때, 그는 분노에 휩싸여 주변 사람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손찌검까지 일삼았다. 간병인만 열 명이 넘게 도망쳤고 결국 최정희는 마지막 방법으로 대역 아내를 들이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그때 만난 사람이 심가은이었다. 순하고 성실한 그녀는 그 누구보다 버텨냈다.
심가은은 담담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되면 아줌마 뵈러 올게요.”
이미 이혼을 앞둔 상황, 더는 ‘엄마’라 부를 수 없었다.
최정희는 살짝 눈가가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그녀 손에 쥐여주었다.
“여기 2억이 있어. 내 마음이라 생각해. 그리고 별장도 다 정리했으니 내일 비서랑 가서 명의 이전해.”
심가은은 잠시 그 카드를 바라보다가 결국 받았다. 계약으로 시작된 결혼이라 해도 지난 3년 동안 아내로서의 책임을 다했고 그 과정에서 모욕과 폭력을 견뎌야 했다. 이 정도 보상은 받아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심가은은 백이현의 차가운 말과 무심한 손찌검, 그리고 노골적인 외도를 버티며 살아왔다. 지난 3년은 그녀의 자존심을 철저히 짓밟은 시간이기도 했다.
“엄마, 지금 언니한테 뭐 주신 거예요? 아까 명의 이전 얘기는 또 뭐고요?”
어느새 다가온 백수민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묻자 최정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쏘아봤다.
“별것도 아닌 걸 왜 그렇게 캐묻니.”
백수민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엄마, 언니한테 몰래 돈 준 거 아니에요? 언니는 매달 오빠가 다 먹여 살리는데 왜 또 챙겨줘요? 언니는 그냥 돈 뜯어내려는 사람이잖아요. 오빠가 힘들 때 어쩔 수 없이 데려왔을 뿐이지, 지금은 필요 없잖아요. 이제는 내쫓아야죠.”
그녀는 이어 심가은을 향해 노골적으로 짐짓 화를 냈다.
“언니 오빠랑 결혼해서 큰 집에 살고 도우미까지 쓰면서 무슨 불만이 있어요? 괜히 욕심부리다간 오빠한테 혼나는 수 있어요.”
과거 몇 년 동안, 오빠가 심가은을 향해 화풀이하는 모습을 지켜본 탓에 백수민에게 심가은은 그저 오빠가 마음대로 다뤄도 되는 존재였다.
심가은은 더 이상 말싸움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고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팔을 붙잡으려던 백수민의 손을 최정희가 단호하게 막아섰다.
“그만해. 가은이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애가 아니야. 이미 너희 오빠랑 이혼하기로 합의했어.”
“정말요? 언니가 그걸 받아들였다고요?”
백수민의 눈이 반짝였다.
최정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억지 부리지 마. 지난 3년 동안 네 오빠 곁을 지킨 건 가은이야. 간병인보다 낫고 진심으로 네 오빠를 챙긴 애야. 그래서...”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고른 뒤, 속내를 털어놓았다.
“내가 돈을 준 건 단순한 보상도 있지만 조용히 떠나게 하려는 뜻도 있어. 세상 사람들이 괜히 우리 아들이 3년 동안 이용만 하고 버렸다고 욕하지 않게 말이야.”
2억과 별장 한 채는 백씨 가문에게는 대수롭지 않았다. 심가은이 조용히 물러난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도 없었다.
백수민은 그 말을 듣자 금세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이제 오빠가 서연 언니랑 결혼할 수 있겠네요?”
그러나 최정희의 얼굴은 단숨에 싸늘해졌다.
“주서연이 여자 친구든, 애인이든 그건 상관없어. 하지만 우리 집 며느리 자리는 절대 꿈도 꾸지 마라.”
백이현의 다리를 잃게 만든 원인이 누구였는지를 최정희는 결코 잊지 않았다.
배신한 여자를 며느리로 들이겠다는 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정희는 이혼 절차가 끝나면 백이현을 다른 집안 딸과 다시 엮어 주겠다고 다짐했다.
...
심가은이 자리를 뜨려던 순간,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심가은 씨!”
돌아보니 주서연이 백이현의 재킷을 어깨에 걸친 채 다가오고 있었다.
심가은은 애써 무시하고 싶었지만 주서연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주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스카프를 건넸다.
“방금 실수로 더럽혀졌는데 이현 오빠가 아스이란드에서 사 준 거예요. 꽤 비싼 거라 손세탁만 가능하거든요. 오빠가 그러시던데 심가은 씨가 워낙 꼼꼼해서 세탁기가 돌린 것보다 훨씬 깨끗하게 나온다고요. 부탁드려도 될까요? 집에 가져가서 세탁 좀 해주시면...”
심가은은 모욕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만하세요. 제가 당신 집안일 해줄 의무는 없으니까요.”
자리를 피하려 하자 주서연이 손목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얌전한 미소가 아닌, 우월감이 묻어나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지금 저한테 그런 말 하셨어요? 당신이 뭘 잘났다고요? 본래 하녀처럼 살아온 주제에 진짜로 이현 오빠 아내라고 생각하세요?”
노골적인 모욕에 심가은의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심가은은 주저 없이 손을 들어 주서연의 뺨을 내리쳤다.
마침 케이크 접시를 들고 오던 백이현이 그 장면을 보았고 그는 급히 달려와 주서연을 부축했다.
“서연아, 괜찮아?”
주서연은 얼굴을 감싸 쥔 채 눈가에 눈물을 맺으며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괜찮아, 오빠. 화내지 마. 언니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냥 내가 오빠 곁에 있어서 집에 안 가니까 화가 난 거겠지. 다 내가 잘못한 거야...”
백이현은 주서연의 말에 고개를 들어 심가은을 노려봤고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심가은 지금 네 행동… 직접 설명해.”
주서연이 사실을 왜곡하는 걸 알면서도 심가은은 더는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설명할 게 있어? 듣기 싫은 소리 했으니 뺨을 맞은 거지. 그게 다야.”
백이현의 호흡은 거칠어지고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손님들 앞이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심가은을 붙잡아 윽박지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심가은은 그런 백이현을 똑똑히 보며 고개를 높이 들었다.
“할 말 없으면 난 이만 가 볼게.”
그녀는 등을 꼿꼿이 세운 채 홀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주서연은 더 서럽게 울며 백이현의 품에 매달렸다.
“오빠, 너무 아파...”
백이현은 낮게 속삭이며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 울지 마. 오늘 밤은 내가 곁에 있을게. 심가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주서연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오빠밖에 없어.”
심가은이 아파트 단지로 돌아오자 경비원이 다가왔다.
“사모님, 택배가 하나 잘못 배달됐습니다. 다른 세대 물건인데 그 집 가사도우미가 관리실 5층에 맡겨놨으니 직접 찾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심가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열어 확인했다. 호기심이 스치자 발길을 관리실 건물 쪽으로 옮겼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순간, 갑자기 불이 꺼졌다.
놀란 그녀는 휴대폰 불빛을 켜고 비상 버튼을 눌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서둘러 관리실에 전화를 걸었으나, 이번에는 신호조차 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배터리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잠시 후, 마지막 불빛까지 사라지자 사방은 완벽한 어둠에 잠겼다.
야맹증이 있는 심가은은 암흑 속에서 금세 숨이 막히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조르는 것 같았고 죽음의 공포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심가은은 머리를 움켜쥔 채 구석에 웅크려 앉아 몸을 떨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등진 그날 밤을 떠올렸다.
불 꺼진 사무실, 손전등 삼아 켠 휴대폰 불빛, 창틀에 걸터앉아 술잔을 들던 아버지의 쓸쓸한 웃음.
그 웃음은 처연하면서도 섬뜩했다. 놀란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이 떨어졌고 불빛은 꺼졌다. 암흑 속에서 홀로 마주한 공포. 그리고 이내 터져 나온 외부의 비명.
“사람이 뛰어내렸어!”
그 순간, 세상이 무너졌다.
심가은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밤새도록 떨며 버텼다.
다음 날 아침, 관리실 직원들이 문을 열었을 때, 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모님, 여기 계셨습니까? 이 엘리베이터는 오래전에 고장 나서 못 쓰게 해뒀는데... 이상하네요. 붙여둔 안내문이 사라졌습니다. 누가 뜯어낸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