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심가은은 입술이 새하얗게 질린 채 다리에 힘이 풀려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저... 들었는데요. 5층에 제 택배가 있다던데요.”
경비 직원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5층은 입주민 전용 헬스장이에요. 거기에 택배가 있을 리 없는데요?”
순간,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심가은은 벽을 짚으며 힘겹게 걸음을 옮겨 단지 입구의 경비실로 향했다.
그녀를 본 경비의 얼굴에 순간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심가은은 손바닥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시킨 거예요?”
경비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저도 원래는 이러기 싫었어요. 사모님, 이건 전부 백이현 대표님이 지시하신 겁니다.”
순간, 머릿속이 텅 비었다.
‘이 모든 게 백이현의 짓이라고?’
심가은은 허탈하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작 어제 주서연 망신을 줬다는 이유로? 그래서 보안 직원까지 시켜서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거야?’
분노가 치밀어 온몸이 떨렸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급히 휴대폰을 충전해 두었던 차단을 풀고 메시지를 보냈다.
[백이현, 너 정말 뻔뻔하다!]
잠시 뒤,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 화면 속 백이현의 얼굴은 차갑게 일그러져 있었다.
“심가은 네가 계속 말 안 듣고 버틴다면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거야.”
심가은은 더는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백이현, 넌 인간도 아니야!”
그러고는 곧장 전화를 끊고 다시 그를 차단해 버렸다.
차단 사실을 확인한 백이현은 분이 풀리지 않아 곁에 있던 비서를 향해 쏘아붙였다.
“난 분명히 물과 전기를 하루만 끊어서 고생 좀 하게 만들라 했지? 그런데 겨우 그 정도에 날 보고 쓰레기라 욕한다고?”
원지아는 잔뜩 주눅이 들어 조심스레 대답했다.
“저도 사모님께서 그렇게 크게 화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한편, 옆방에 있던 주서연은 휴대폰 화면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 초조하게 몸부림치는 심가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주서연은 영상을 끝까지 확인한 뒤, 흡족한 표정으로 경비에게 돈을 송금했다.
...
며칠을 버티고 난 끝에 최정희가 직접 이혼 합의서를 가져왔다.
심가은은 합의서를 거실 탁자 위에 내려놓고 곧장 도착한 택배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초록색 페인트 두 통이 들어 있었다. 심가은은 망설임 없이 페인트를 집 안 곳곳에 들이부었다. 거실 벽, 소파, 그리고 백이현이 애지중지하던 명화까지도 전부 초록색으로 얼룩졌다.
그 후 장미숙에게 메시지를 보내 이번 달은 쉬라고 알리고 월급도 미리 송금해 두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심가은은 캐리어를 끌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잠시 후, 백이현은 주서연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서연은 그의 팔에 몸을 기대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현 오빠, 나 너무 배고파. 언니가 해주던 집밥이 너무 그리워.”
백이현은 태연하게 답했다.
“걱정하지 마. 금방 해주게 하지.”
며칠 전 심가은이 보여준 싸늘한 태도 때문에 일부러 냉담하게 굴며 시간을 벌었다.
어차피 언제나처럼 조금 지나면 그녀가 먼저 고개 숙이고 들어올 거라 생각했다.
결혼 3년 동안 수없이 반복된 일이었고 결국 심가은은 늘 그랬듯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었다. 만약 다시 고개 숙이면 카드 한 장쯤 내줄 생각이었다. 혹시 모자란다고 하면 한 달 한도에 2천만 정도는 더 얹어 줄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현관문을 열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것은 페인트 냄새였다. 백이현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안으로 들어섰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집 안 구석구석이 온통 초록색 페인트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벽지, 가구, 심지어는 그가 수십억을 주고 산 명화까지...
백이현은 분노가 치밀어 온몸이 떨렸다.
주서연도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현 오빠, 이게 대체 뭐야? 집이 왜 이래?”
백이현의 관자놀이와 목덜미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는 심호흡을 내쉬며 주서연의 휴대폰을 빼앗아 심가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각, 택시 안에서 낯선 번호를 받은 심가은은 차갑게 물었다.
“누구세요?”
전화기 너머로 터져 나온 건 백이현의 격한 고함이었다.
“심가은 너 미쳤어?”
심가은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백이현이 저렇게 분노할수록,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내가 준비한 이혼 선물, 맘에 들어?”
하지만 백이현의 귀에는 ‘이혼’이라는 단어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오직 망가진 수집품들만 떠올리며 분노를 내뱉었다.
“당장 돌아와!”
“난 안 돌아가.”
심가은의 목소리는 느릿하고 침착했다. 마치 날씨 이야기라도 하듯 가볍게 이어졌다.
“그리고 소송할 생각도 마. 며칠 전 네가 날 일부러 엘리베이터에 가둬 하루 종일 고생하게 한 건 명백한 인신 구속이야. 원하면 법원에서 보자고. 난 그걸로 충분히 맞대응할 수 있어.”
“무슨 헛소리야? 내가 언제 널 엘리베이터에 가뒀다고 그래?”
백이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쳤다.
물과 전기를 끊어 잠깐 겁만 주라 한 건 맞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라니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옆에서 듣던 주서연의 눈길이 흔들렸다. 잠시나마 눈빛에 죄책감이 스쳤지만 곧 고개를 떨구며 침묵을 택했다.
심가은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기억도 안 나? 바쁘셔서 잊으셨나 본데 궁금하면 관리사무소에 물어보지 그래.”
말을 마친 그녀는 주저 없이 전화를 끊고 다시 차단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심가은!”
백이현은 더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고 곧바로 차단까지 당했다. 백이현은 분노에 가슴이 답답해져 숨이 막히는 듯했다.
“저 여자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무슨 엘리베이터라니...”
백이현은 즉시 휴대폰을 꺼내 들어 원지아를 불러내려 했다. 며칠 전 밤 심가은에게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주서연이 갑자기 힘없이 그의 팔에 몸을 기댔다.
“이현 오빠... 나 어지러워. 머리가 너무 아파. 우리 그냥 여기서 나가자...”
백이현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페인트 냄새 때문이라 짐작하고 다급히 부축해 밖으로 나왔다. 마침 근처에 또 다른 별장이 있었기에 곧장 그곳으로 주서연을 데리고 갔다.
원지아를 다시 떠올린 건 밤이 깊은 뒤였다. 조사 지시를 내리자 곧 결과가 돌아왔다.
“회장님, 5일 전 전 사모님이 실제로 엘리베이터에 갇혔던 게 맞습니다. 그때 한 경비가 직접 사모님을 그쪽으로 안내했고... 다만 그 경비는 오늘 아침에 이미 사직서를 내고 떠나버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정말 누군가 의도적으로 가은이를 해친 거라고?”
백이현은 휴대폰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낮게 물었고 목소리에는 살기가 배어 있었다.
“수단이 뭐가 됐든 무조건 그 경비를 찾아내!”
“네, 알겠습니다.”
옆에서 이 통화를 들은 주서연은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행히 자신이 미리 경비에게 돈을 쥐여주고 흔적도 없이 떠나게 만든 게 떠올랐다.
그런데 원지아는 전화를 끊지 않고 다시 보고했다.
“아, 회장님. 이미 청소부를 보내 별장을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집안에 이혼 합의서가 있었어요. 가져다드릴까요?”
“이혼 합의서?”
백이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소리야. 이혼이라니?”
그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심가은과 잘 살고 있는데 어떻게 이혼을 했다는 거지?’
잠시 뒤, 원지아는 직접 문서를 들고 찾아왔다. 백이현은 서류를 받아 들고 눈을 의심했다.
“말도 안 돼... 내가 심가은이랑 이혼을 했다고? 이건 불가능해! 난 서명한 적 없어!”
원지아는 난처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작 본인이 모른다니 대답할 길이 없었다.
주서연은 속으로 웃었다.
‘역시 이현 오빠가 나 몰래 준비해 둔 거였구나. 이제 우리 사이를 숨길 이유가 없네.’
기쁨에 들뜬 마음으로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백이현이 이혼 합의서를 집어 던졌다.
“이건 가짜야! 내가 심가은과 이혼했을 리가 없어!”
주서연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그러지? 이제야 벗어났는데...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거야? 이현 오빠는 심가은을 싫어했던 거 아니었어?’
혼란스러운 기류 속에서 백이현은 법무팀에 전화를 걸었다.
법무 담당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회장님... 지난달에 어머님께서 위임하신 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직접 이혼 서류를 준비했고 회장님께서 서명까지 하셨습니다.”
“어머니?”
백이현은 곧장 전화를 끊고 최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정희는 그가 모른다는 말에 오히려 의아해했다.
“이현아, 무슨 말이야? 그건 네가 직접 사인한 거야. 이렇게 큰일을 어찌 까맣게 잊을 수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