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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내가 사인한 거라고?" 백이현은 문득 한 달 전을 떠올렸다. 그때 심가은이 서류 한 장을 내밀며 사인을 부탁했었는데 그는 대수롭지 않게 돈 달라는 서류겠거니 하고 제대로 보지도 않고 이름을 적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 서류가 이혼 협의서였다는 사실을. 그런데 왜 심가은은 단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았을까. 분명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어왔는데 아무리 매몰차게 대해도 곁을 떠나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이혼을 꺼내 든 걸까. 백이현은 알 수 없었다. 그는 전화를 붙잡고 최정희에게 물었다. “엄마, 왜 말리지 않으셨어요? 저는 이혼할 생각 없었어요.” 최정희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백이현이 심가은에게 아무런 정이 없다고만 생각해 왔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현아, 그런데 가은이는 이미 떠났어. 정말 마음을 다 접은 것 같더구나. 어차피 끝난 인연이니 이제는 놓아주고 앞을 봐야지.” 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그의 화를 더 키웠다. “난 동의한 적 없어. 그 이혼은 무효야. 그리고 심가은은 내 여자야. 죽더라도 내 사람이어야 해. 절대 그냥 보내지 않을 거야.” 최정희는 한동안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백이현은 전화를 끊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어 곁에 서 있던 원지아에게 날카롭게 지시했다. “심가은이 지금 어디 있는지 당장 찾아.” 원지아는 멍해졌다. ‘주서연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심가은이 스스로 이혼을 제기했다면 백이현한테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백이현은 마치 버림받은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주서연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국에 돌아오기만 하면 당연히 백이현이 심가은을 내치고 자신과 결혼할 거라 믿어왔으니까. 하지만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설마 대표님이 심가은을 좋아하는 걸까? 그럴 리 없는데. 만약 그렇다면 왜 그동안 주서연을 곁에 두었던 걸까.’ 원지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백이현은 자존심이 워낙 강한 사람이라 자신이 먼저 이혼을 꺼낼 수는 있어도, 심가은이 먼저 이혼을 요구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원지아는 백이현이 심가은을 쫓는 건 사랑 때문이 아니라, 상처 난 자존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심가은은 새집에서 모처럼 숙면을 취했다. 다음 날, 최정희의 비서와 함께 청해가든 별장 명의 이전 절차를 마쳤다. 서류 처리가 끝나자마자 그녀는 곧장 부동산을 찾아가 별장을 내놓겠다고 했다. 큰 거래라 그런지 중개인은 공손하게 응대하며 최대한 빨리 매수자를 찾아주겠다고 여러 번 약속했다. 심가은은 집이 팔리지 않을 거란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 후 그녀가 향한 곳은 병원이었다. 어머니 신정민은 이전보다 훨씬 안정된 모습이었다. 병실에서 다른 환자들과 어울리며 지내다 보니 심심할 틈도 없었다. 심가은이 들어섰을 때 신정민은 기운차게 병실 동료들과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심가은은 웃으며 과일 바구니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칼을 꺼내 정성스레 과일을 깎았다. 그리고 접시에 담아 다른 아저씨, 아주머니들과 나눠 먹고 한 조각을 포크에 꽂아 신정민 입으로 가져갔다. 신정민은 자연스럽게 받아먹으며 물었다. “가은아, 이현이는 같이 안 왔어?” 심가은은 손길이 잠시 굳었다가 억지로 웃으며 답했다. “응, 요즘 바빠서요. 시간 나면 꼭 온다고 했어요.” “그래? 그럼 너희는 애는 언제 가질 거야? 내가 손주 봐줄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병 때문에 기억이 자주 끊기고 어제 일을 오늘이면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여전히 집안 회사가 잘 돌아가고 있고 남편은 출장 중이라고 믿고 있었다. 심가은이 갓 결혼했을 무렵, 백이현이 휠체어를 타고서도 종종 함께 병원을 찾았던 기억이 어머니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백이현은 거의 오지 않았지만 신정민은 그런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 눈에는 여전히 두 사람이 사이좋은 부부였다. 심가은은 신정민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이혼 이야기는 꺼낼 수 없었다. 그저 웃으며 지갑에서 현금 몇 장 꺼내 카드판 위에 올리며 화제를 돌렸다. “엄마, 또 애 얘기 꺼내면 저 머리 아파요. 그냥 게임에 집중하세요. 제 돈 다 잃게 생겼잖아요.” 신정민은 소녀처럼 웃으며 대꾸했다. “네 아버지가 돈은 다 나한테 맡겼는데 내가 네 돈쯤이야...” 심가은은 눈가가 젖을 뻔했지만 애써 장단을 맞췄다. “맞아요. 아빠는 엄마밖에 모르잖아요.” 한참 후 카드놀이가 끝나자 심가은은 신정민과 함께 병원 정원에 나가 햇볕을 쬐었다. 신정민은 문득 물었다. “가은아, 내가 입원한 지 벌써 두 달이나 됐는데 너희 아버지는 왜 아직 안 돌아와? 전화는 해 봤어?” 심가은은 마음이 저려왔지만 표정을 감추고 부드럽게 말했다. “아빠가 해외에서 프로젝트 때문에 바빠요. 최대한 빨리 돌아오신다고 했어요.” “어휴, 그 사람은 일만 하면 집안은 뒷전이지. 가족 생각은 안 하고.” 잠시 후,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내가 몇 번이나 메시지를 보냈는데 왜 답이 없어?” 심가은은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이어갔다. “아빠 성격 아시잖아요. 일 시작하면 전화도 안 보고 메시지도 잘 안 보시니까요.” 신정민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내밀었다. “이번에 돌아오면 절대 못 나가게 해야겠다. 이제 나이도 있는데 회사 일은 후배들한테 맡기고 나랑 시간을 보내야지.” 심가은은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엄마. 제가 아빠한테 꼭 말씀드릴게요.” 심가은의 말에 신정민은 기분이 한결 나아져 환하게 웃었다. 잠시 후, 심가은은 병원을 떠나 자신이 세 들어 사는 아파트로 향했다. ... 며칠 푹 쉬고 난 뒤, 심가은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지난 3년 동안 낮에는 늘 피아노를 연습해 온 덕분에 전문적인 감각을 잃지 않고 있었다. 면접과 실기 시험도 무난히 통과해 바로 수습 기간에 들어갔다. “내가 뭐랬어, 잘될 거라고 했잖아. 정식으로 채용되면 내가 크게 한턱낼게.” 같이 일하는 설하영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응원했다. 심가은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건넸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긴장감이 남아 있었다. 첫 직장인지라 수업 시간에 실수할까 봐, 그녀는 미리 여러 번 연습하고 들어갔다. 다행히도 지금 맡은 두 학생은 성격이 순하고 예의도 바르다 보니 수업 분위기 역시 원만했다. 수습 평가가 워낙 까다로워 매일 정신없이 바빴고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그대로 잠들어 버릴 만큼 피곤했다. 덕분에 지난 결혼 생활의 불행했던 기억을 붙잡고 있을 틈조차 없었다. 그날도 늦게까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병원 간병인 허영주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신정민이 병실에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심가은은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너무 다급한 나머지 발을 헛디뎌 크게 넘어지고 말았다. 순간 발목에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와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난간을 붙잡았다. 일어서려 했지만 마음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낮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심가은은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거센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선, 길고 단정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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