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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진서후가 켕기는 게 있는지 머리를 긁적이면서 기세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화제 돌리지 마.” “내가 어떤 돌렸다고 그래?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나 삼촌 보러 온 거야. 여기서 우연히 서영이 만나서 잠깐 얘기한 거고. 이런 일까지 따지고 들 거야?” “그런 거였구나. 화내지 마, 서후야. 난 네가 이미 나경 그룹에 입사했다는 소리를 듣고 따라온 거야.” 그 말에 진서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조금 전까지 불같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긴장해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누가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 그런 거 아니야...” “진서후, 아직도 나 속이려고?” 내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진서후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유나야, 사실 이건... 오해야. 내가... 내가...” 그는 머리를 쥐어짜며 변명거리를 찾으려 했지만 그럴싸한 이유를 대지 못했다. 결국 내가 변명거리를 찾아줬다. “설명 안 해도 돼. 나한테 얘기할 시간이 없어서 미처 못 말한 거 알아.” “맞아, 그거야. 너한테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네가 먼저 알았을 줄은 몰랐어. 차라리 잘됐어.” 마침 면접 시간이 되어 담당자가 우리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신서영은 진서후에게 싸늘한 눈초리를 던지고는 휙 가버렸다. 진서후의 삼촌이 이 회사의 대표라 그가 입사하겠다고 하면 전화 한 통이면 되었다. 하지만 대놓고 신서영을 입사시킬 용기는 없었는지 몰래 인맥을 동원했다. 하여 신서영의 면접은 단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고 반면 나는 수십 명과 한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했다. 다행히 학교 이름값과 침착한 면접 태도로 순조롭게 합격했다.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나는 걸음걸이마저 절로 가벼워졌다. 앞으로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면접관이 다가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금방 대학교 졸업한 젊은 여자가 대표님 비서로 일하려면 많이 힘들 거예요. 게다가 대표님 성격이 좀 까다로우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요. 열심히 할게요.” ‘서후 삼촌이 성격이 까다롭다고? 내 기억으론 그렇지 않은데.’ 양가 모임 때마다 그는 항상 나와 진서후에게 선물을 챙겨줬고 학업도 걱정해줬었다. 창업 스트레스 때문에 성격이 변해 날카로워진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욕먹는 것쯤은 두렵지 않았다. 로비에서 신서영과 진서후가 다투는 듯했는데 내가 다가가자 바로 싸움을 멈췄다. 신서영이 금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 합격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 좋게 붙었어.” 신서영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축하해. 그런데 잘 생각했으면 좋겠어. 이 회사 크지 않아. 네 실력이면 더 좋은 데 갈 수 있어.” 진서후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우리 삼촌네 회사야. 나야 집에서 보내서 어쩔 수 없이 온 거지만 넌 달라. 넌...” “서후야, 난 네 옆에 있을 거야. 회사가 크든 작든 상관없어. 그리고 이 회사도 좋아.” ‘날 쫓아내려고? 꿈 깨.’ 진서후는 더는 할 말이 없는지 짜증과 귀찮음이 섞인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릴 때부터 나는 껌딱지처럼 진서후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가 나에게 질렸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를 따라다니려고 이러는 게 아니었다. 차라리... 나는 웃으며 물었다. “서영이 넌 왜 나경 그룹에 온 거야? 네 실력이라면 상장회사도 충분히 갈 수 있을 텐데.” 신서영이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해볼게. 나한테 제일 맞는 곳을 찾아야 하니까 여기저기 다 가볼 거야.” 그러고는 진서후에게 미소 지으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난 다른 면접 때문에 이만 갈게.” 진서후의 시선이 신서영에게서 떠나질 않았다. 그녀가 대문을 나가서야 나를 돌아봤다. “유나야, 나도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학교는 너 혼자 가야겠어.”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휙 가버렸다. 둘이 몰래 연애하는 것도 꽤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들에게 당당하게 함께할 기회를 줄 것이다. 며칠간 작사 작곡에 매달렸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다. 대회 날짜가 점점 다가오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역시 나에게는 재능이 없는 걸까... 이마를 짚고 멍하니 있던 그때 머릿속에 문득 가사가 떠올랐다. 나와 함께 꽃밭을 거닐던 너, 너의 미소가 내 마음에 깊이 새겨졌어. 오, 베이비, 내가 너의 유일한 사랑이라고... 이 노래에 대한 기억이 아주 선명했다. 지난 생에 진서후가 나에게 강제로 낙태약을 먹인 그날 밤 나는 구석에 웅크린 채 떨고 있었고 그는 신서영을 안고 춤을 췄다. 신서영은 나를 도발하려고 일부러 부드러운 러브송을 틀었다. 이 노래는 3년 뒤에 발표될 곡이다. 그리고 난 환생했고... 즉시 펜을 들어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저녁에 기숙사로 돌아와 씻고 나오자마자 진서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평소에는 항상 내가 먼저 진서후를 찾았지, 그가 먼저 연락하는 법이라곤 없었다. [음악 대회 안 나갈 거니까 너 혼자 나가.] 지난 생에 이 메시지를 받고 조급해진 나는 진서후를 설득하려고 계속 전화했었다. 그가 대회에 나가면 헤어지겠다고 협박한 신서영의 목적은 나의 비참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차갑게 웃으며 답장했다. [알았어.] 핸드폰을 내려놓고 잠을 청하려는데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진서후의 메시지였다. [온유나, 너 요즘 왜 그래? 뭔가 이상해.] 진서후가 대회에 안 나간다고 하면 내가 울며불며 매달릴 줄 알았는데 덤덤하게 나오니 오히려 그가 당황했다. [뭐가 이상해?] 진서후도 구체적으로 뭐가 이상한지 몰랐던 터라 한참 말이 없다가 간단하게 답했다. [아니야, 됐어...] 나는 피식 웃고는 핸드폰을 꺼버렸다. 그날 밤 아주 꿀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9시에 눈을 떴다. 4학년이라 수업도 거의 없었고 졸업을 앞둬 할 일도 적었다. 다들 늦잠을 잤지만 나는 아침을 챙겨 먹어야 해서 일찍 일어났다. 성다예도 비몽사몽 일어났다. “유나야, 같이 가자. 잠깐만 기다려.” 기숙사를 나서며 학교 식당에서 먹을지, 학교 밖에 있는 식당에서 먹을지 고민했다. 학교 밖에 식당이 많았고 맛도 괜찮았다. 한참 망설이다 결국 학교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같은 반 친구 장태원을 만났는데 한 손에는 찐빵 하나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찐빵과 만두가 잔뜩 담긴 봉지를 들고 있었다. 룸메이트들 몫까지 사 온 모양이었다. 우리를 보자마자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달려왔다. “온유나, 너랑 서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싸웠어?” 장태원은 진서후의 룸메이트였고 평소에도 친하게 지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안 싸웠는데? 갑자기 왜 그렇게 물어?” “어젯밤에 서후가 자기 작사 작곡한 거 전부 태워버리고 기타도 부쉈어. 너한테 헤어지지 말자고 울면서 음성 메시지 보내는 거 봤다고.”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무슨 상황인지 바로 깨달았다. 진서후가 신서영에게 결심을 보여주려고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남들 눈엔 나와 싸워서 그가 폭발한 것으로 보였다. 억울하지만 감수하기로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찌푸렸다. “아, 어제 서후랑 좀 다투긴 했는데 별일 아닌 줄 알았지...” 장태원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서후 진짜 엄청난 로맨티스트구나.” 나는 그 말에 완전히 동의했다. 진서후는 정말 사랑에 목을 맸다. 다만 그 대상이 내가 아니라 신서영일 뿐. 장태원이 찐빵을 먹으면서 말했다. “너랑 서후 몇 년이나 만났는데 해결 못 할 일이 뭐가 있겠어? 앉아서 차분하게 얘기 잘해. 헤어지겠다고 하면 감정만 상해.”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나 봐. 서후랑 잘 얘기해볼게.” 물론 이건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었다. 나는 이미 진서후 때문에 독한 여자친구로 낙인찍혔다. 여기서 무관심하면 내 평판만 더 엉망이 될 터. “그래.” 장태원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는 갈 길을 갔다. 성다예가 턱을 괴며 나를 쳐다봤다. “너희 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서후가 게임에 져서 다른 여자랑 키스해도 화를 안 내던 네가 이번엔 왜 화났는데? 혹시 더 심한 짓 했어?” 나는 순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숨을 들이쉬었다. 사실은 신서영 때문에 저렇게 힘들어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내가 헤어지자고 해서 저러는 줄로 알았다. 게다가 그를 도와서 거짓말까지 해야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참아야 한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성다예가 급히 재촉했다. “빨리 말해. 대체 무슨 일이야? 4년 친구로 지낸 나한테도 숨길 거야? 내가 이런 가십거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도 알잖아. 얘기 안 하면 하루 종일 이 생각만 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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