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Open the Webfic App to read more wonderful content

제7화

그 모습에 당황한 나는 진수혁을 불렀다. “삼촌.” 진수혁이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는 그의 눈빛이 깊고 복잡했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아무 문제 없대요. 약 좀 바르면 괜찮아질 거래요.” 진수혁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진서후와 신서영이 사라진 방향을 다시 쳐다봤다.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했다. 진수혁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너랑 서후 요즘 어때?” 나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왜요?” “서후 좀 이상하지 않아?” 진서후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아는지 떠보고 있었다. 나는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상하긴요. 그냥 요즘 좀 바빠서 저랑 있을 시간이 없는 거예요. 삼촌, 왜 갑자기 그렇게 물어요?” 말하면서 일부러 속상하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진수혁이 내 어깨를 감쌌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의 몸에서 은은한 삼나무 향이 났다. 크고 단단한 그에게 기대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고개를 든 순간 진수혁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 안타까움과 연민이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불쌍해 보였나 보다. ‘그럴 만도 하지. 진서후가 4년 내내 날 속였고 또 평생 날 속이려 했는데.’ 하늘이 어두워지자 경한시의 불빛이 화려하게 반짝였다. 진수혁은 나를 혼자 보낼 수 없어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고집했다. 집에 도착하니 윤성희와 진태현이 와 있었다. 두 집이 문만 열면 바로 보일 정도로 가깝게 붙어있어 윤성희는 틈만 나면 우리 집으로 놀러 왔다.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고. 하여 그들을 집에서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나와 진수혁이 함께 온 걸 본 윤성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도련님도 유나 집에 놀러 왔어요?” 그러자 진수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유나가 넘어져서 병원에 데려갔다가 집까지 데려다준 거예요.” “유나 다쳤어?” 윤성희가 화들짝 놀라더니 바로 내 무릎 상처를 살폈다. “상처가 왜 이렇게 커? 많이 아파?” “괜찮아요. 그냥 살짝 긁힌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윤성희와 진태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윤성희가 이내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서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자기 와이프도 제대로 못 챙기고. 내가 직접 따져 물어야겠어. 결혼하고 나서 유나를 힘들게 하면 큰일이야.” 그 말에 진수혁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듯 잠시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했다. “형수님, 형, 잠깐 나와 보세요. 할 얘기가 있어요.” 윤성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그냥 여기서 해요. 우리 두 집안은 비밀 같은 거 없어요.” 진수혁이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안타깝게 한 번 쳐다보더니 곧장 밖으로 나갔다. 윤성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유나야, 이모 먼저 갈게. 약 제때 바르고 몸 잘 챙겨. 무슨 일 있으면 이모한테 전화해. 알았지?” 내가 고개를 끄덕인 후 윤성희와 진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진수혁이 오늘 일을 말할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못 본 척한 바람에 말리려고 해도 말릴 방법이 없었다. 씻은 과일을 내오던 엄마가 나를 보며 물었다. “성희 어디 갔어?” 나는 사과 한 조각을 집어 한 입 베어 물며 솔직하게 말했다. “이모랑 아저씨는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셨어요.” “무슨 일인데?” “저도 몰라요.”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오늘 밤 진서후에게 큰일이 날 거라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저녁에 맞은편 집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와 가죽 벨트로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윤성희네 집이 지금 아수라장일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급히 문 앞으로 가서 귀를 기울였다. 무슨 일인지 알아내려 했지만 진서후의 애원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엄마가 턱을 만지며 나에게 물었다. “유나야, 서후 무슨 사고라도 쳤어? 성희가 왜 애를 저렇게 쥐 잡듯이 잡아?” 윤성희와 진태현은 외동아들인 진서후를 아주 끔찍이도 아꼈다. 어릴 적부터 이렇게 심하게 혼낸 적이 없었다. 소리만 들어도 이번에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엄마는 내가 모른다고 하자 더 묻지 않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맞은편 문을 쳐다보다가 결국 문을 두드렸다. 윤성희가 문을 열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서후 무슨 사고라도 쳤어? 아무리 사고 쳐도 잘 타일러야지, 이렇게 때리면 어떡해.” 윤성희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 오늘은 그냥 모른 척해줘요. 내일 내가 얘기할게요.” 그녀가 이렇게까지 얘기한 이상 엄마도 더 물을 수가 없어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그 후로 부모님은 진서후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온 저녁 추측했다. 하지만 그가 나를 배신했다는 추측은 전혀 하지 못했다. 한 시간 뒤 맞은편 집의 소란과 비명이 멈췄다. 드디어 조용히 잠을 잘 수 있었다. 진서후가 그날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윤성희가 그를 데리고 우리 집에 찾아왔다. 윤성희가 웃으며 말했다. “유나야, 무릎 아직도 아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많이 나았어요, 이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행이야. 서후가 그러는데 어제 네가 다친 줄 몰랐대. 마침 같은 반 친구도 다쳐서 너를 못 챙겼다더라고. 어제 내가 혼쭐을 냈으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 나의 시선이 진서후에게 향했다. 부모님이 왼쪽 귀를 잡아당겼는지 빨개져 있었고 눈이 퉁퉁 부었으며 팔에도 상처가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전부 털어놨나 했더니 놀랍게도 신서영과의 관계를 끝까지 부인하고 친구 사이라고 우겼다. 윤성희가 한숨을 쉬며 진서후의 머리를 쿡 찔렀다. “다음에 또 이런 일 있으면 절대 가만 안 둬.”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영화표 두 장을 꺼내 나의 손에 쥐여줬다. “유나야, 서후한테 오늘은 꼭 네 옆에 있어 주라고 했어. 둘이 영화 재밌게 보고 와.” 진서후와 영화관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개미 수천 마리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고통스러워 저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진서후도 같은 생각인지 툴툴거렸다. “영화 뭐 볼 게 있다고 그래요? 안 봐요.” “영화가 중요해? 유나 옆에 있어 주는 게 중요하지.” “아무튼... 가기 싫어요.” 윤성희가 화내기 전에 내가 얼른 말했다. “이모, 저희 영화 볼 시간이 없어요. 웨딩드레스도 맞춰야 하고 들러리 드레스도 준비해야 하거든요...” 그 말에 윤성희가 잠시 멈칫했다. “들러리 다 정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사람은 정했는데 아직 옷을 못 골라서 요 며칠에 골라놓으려고요.” 윤성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 준비가 더 중요하지. 드레스 보러 가야 한다면 영화는 안 봐도 돼. 진서후, 이번에 또 유나 혼자 버려두면 집에 들어올 생각 하지도 마.” 진서후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저...” 나는 헛기침하고는 일부러 신난 척하며 핸드폰을 들면서 진서후의 말을 가로챘다. “지금 서영이랑 애들한테 연락할게.” 그 말에 진서후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엄마, 걱정하지 말아요. 유나 잘 챙길게요.”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알아?’ 신부 들러리는 대부분 내 대학교 룸메이트와 같은 반 친구였고 신랑 들러리도 진서후의 룸메이트와 친구들이었다. 졸업 시즌이라 인턴을 시작한 친구들 빼고는 다들 시간이 넉넉했다. 그리고 옷이 중요했기에 같이 가서 고르기로 했다. 부모님도 휴가를 내고 함께 갔다. 윤성희와 진태현은 휴가를 못 내서 함께하지 못했지만 나의 부모님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았다. 일행은 웃고 떠들면서 이따금 장난을 쳤다. “두 사람 너무 부러워.” 성다예가 기대에 찬 얼굴로 말했다. “나도 언제 운명적인 남자를 만날까?” 그 말에 엄마가 흐뭇하게 웃었다. 엄마라면 딸이 행복하길 바라는 법이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으면서 진서후와 신서영을 곁눈질했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사람이 많지 않았다면 아마 진작 끌어안았을 것이다. 하여 일부러 그들에게 기회를 만들어주기로 했다. 나는 마네킹이 입은 드레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예, 지혜야, 저 드레스 예쁜 것 같은데 입어보지 않을래?” 성다예가 턱을 만지며 고민하자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입어 봐.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거 고르면 되지.” 룸메이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바로 점원을 불러 옷을 가져오라고 했다. 같은 방법으로 신랑 들러리도 옷을 갈아입으러 보냈다. 커튼이 쳐진 순간 나는 뒤를 돌아봤다. 진서후와 신서영이 계속 구석에 있었는데 다들 옷을 갈아입느라 그들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나도 귀찮아서 무시했다. 성다예가 제일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왔고 나는 기대에 부푼 얼굴로 커튼을 열었다. “유나...” 바로 그때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다들 무슨 일인가 싶어 커튼을 열고 나와 보니 진서후와 신서영이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 순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충격에 빠졌다. 엄마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비틀거리며 제대로 서 있지조차 못했다. 이 와중에도 내가 걱정되어 얼른 데리고 나가려 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바람피우는 현장을 잡았는데 이대로 갈 리가 있나? 아빠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진서후와 신서영을 가리켰다. “너희 둘... 너희... 이 뻔뻔한 것들. 진서후, 우리 유나 배신하면 네 엄마 아빠가 다리 부러뜨리겠다고 했던 거 잊었어?” 진서후도 창피한지 재빨리 신서영과 거리를 두고는 당황해하며 변명했다.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서영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맞지만 유나한테 명분은 꼭 주겠습니다.”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가 보면 내가 강요한 줄 알겠다. ‘내가 그 명분을 원할 것 같아?’ 신서영도 억울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저씨, 아주머니, 제가 유나한테 상처 준 거 알아요. 앞으로 서후랑 다시는 만나지 않을게요. 깔끔하게 헤어지겠습니다.” 나는 차갑게 웃으며 앞으로 나선 후 또박또박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두 사람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냥 만나. 다들 봤지? 서후가 먼저 바람피운 거. 나 파혼할 거야.” 파혼하겠다는 소리에 진서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온유나, 내가 명분 준다고 했잖아. 적당히 해.” “네 아내가 되는 게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줄 알아?” “너...” 진서후가 분노하며 이를 갈았다. “온유나, 어릴 때부터 다들 네가 내 아내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 나랑 파혼하면 버려진 헌신짝인 널 데려갈 사람이 있을 것 같아?” 그러고는 신랑 들러리들에게 말했다. “온유나 있잖아. 날 20년 넘게 따라다녔어. 중고품이나 다름없지. 공짜로 줘도 아무도 안 가져갈걸?” 신서영이 몰래 피식 웃더니 또 이내 동정하는 척했다. “유나야, 너 서후랑 그렇게 오래 만났는데 누가 널 데려가겠어? 너한테는 선택지가 없어. 서후랑 다신 안 만날 테니까 그냥 넘어가 주면 안 될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진서후와 어릴 적부터 혼담이 오간 건 맞지만 엄마는 늘 혼전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여 그와 선을 넘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함께 자란 세월을 빌미로 내 명예를 더럽힐 줄은 몰랐다. 게다가 아무도 날 데려가지 않는다고? 나는 화가 나서 주변 사람들을 훑어보다 진수혁을 발견했다. 그도 오늘 여기에 온 줄은 몰랐다. 미혼이라 좋은 기운을 받으려고 진서후의 들러리를 서기로 했다. 나는 진수혁에게 다가가 그의 넥타이를 잡고 발꿈치를 든 채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충격받은 듯 진수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고개를 들고 진지하게 물었다. “삼촌, 저랑 결혼할래요?”

© Webfic, All rights reserved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