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서준 씨...”
옆방에서 들려오는 신음이 송서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서 미친 듯이 아팠지만 가슴을 쥐어짜는 고통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조여오는 고통에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으니까.
오늘은 원래 그녀가 세상과 작별을 고하려던 날이다.
49일 전, 박씨 일가에 날아든 비보. 남편 박유준과 아주버님 박서준이 탄 비행기가 추락했다. 아주버님 박서준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남편 박유준은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 밤, 송서아는 목이 쉬도록 울다가 기절했다.
박유준이 죽고 49재가 지난 뒤, 그녀는 더 이상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했다.
수면제를 한 달 치 모아두었지만 남편 없는 박씨 일가에서 홀로 죽는 것은 너무 외로웠다.
결국 그녀는 수면제를 챙기고 남편의 묘소로 향하려 했다. 하필 그때, 박씨 일가 정원에서 시어머니 민채원과 아주버님 박서준의 대화를 엿듣게 되는데...
“유준아,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가윤이가 좀처럼 임신을 못 하네. 혹시 가윤이한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네가 서준이로 위장한 건 대를 이으려고 그런 건데 도통 임신 소식이 없네. 이걸 어쩌면 좋아? 서아도 몇 해 동안 애를 못 낳더니, 우리 집안 대체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거야!”
그 순간, 송서아는 하마터면 박씨 저택 정원에서 쓰러질 뻔했다. 두 손으로 겨우 화단을 짚고서 마치 벼락에 맞은 것처럼 한동안 멍하니 넋을 놓았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혹여나 비명을 지를까 봐 입을 꽉 틀어막았다.
그녀의 남편 박유준은 죽지 않았다!
죽은 것은 박유준의 형 박서준이었다. 결혼 후 몇 년간 임신을 못 하는 그녀 때문에 박씨 일가에서 이런 비열한 수단을 썼다는 말인가?
송서아는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는 박유준은 절대 이런 사람이 아니니까.
시어머니 민채원이 박씨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이런 짓을 꾸몄다고?
다만 박유준이 입을 연 순간, 송서아의 그 추측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가윤이 데리고 검사받아봤는데 아무 문제 없었어요. 임신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뿐이에요. 저도 엄청 노력하고 있다고요.”
노력? 그래, 노력! 지난 한 달 동안 박유준은 거의 매일 밤 그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 송서아는 사별의 아픔을 겪을 뻔한 아주버님 부부가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고 더 뜨겁게 사랑하노라 여겼다.
이제 보니 이렇게 역겨울 수가...
박유준이 곧장 말을 이어갔다.
“엄마, 앞으로 집에서 이런 얘기 하지 말아요. 가윤이가 들으면 충격받을 거잖아요. 안 그래도 몸이 약하고 겁이 많은 아이인데 서준 형 죽은 걸 알게 되면 따라가겠다고 자살할 수도 있다고요.”
박유준 이 인간은 결코 강요당한 것이 아니었다.
본인도 허가윤을 엄청 아끼고 있었다.
송서아는 화단에 주저앉아 쓴웃음을 지었다. 허가윤이 남편 사망 소식에 자살할지도 모른다고? 그럼 그녀는? 송서아는 뭘까?
나약하고 겁이 많다고?
함께 따라간다고?
이게 고작 천 일 동안 함께 지내온 남편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니?
그런 줄도 모르고 묘소까지 찾아가서 생을 마감하려 했는데... 송서아는 생각만 하면 스스로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박유준 홀로 차갑고 쓸쓸하게 있을까 봐 가슴앓이를 할 때, 정작 이 인간은 형수가 남편 사망 소식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조강지처도 내팽개치고 형을 대신해서 집안의 대를 이으려 했다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수중의 수면제 병을 꽉 쥐고서 지난날 박유준과의 행복했던 순간들이 필름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제 박유준 장본인이 직접 그 필름을 스톱했고 모든 걸 종결했다.
송서아는 한때 박유준과 함께 지냈던 침실로 살며시 돌아왔다.
침대 옆 탁자 위에는 여전히 유젠으로 떠났던 신혼여행 사진이 놓여 있었는데 사진 속 그녀의 환한 미소와 지금의 쓰디쓴 눈물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지난 한 달간, 그녀는 이 사진만 안고 겨우 잠들었는데 어떻게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그야말로 한심할 따름이었다.
송서아는 액자를 집어 던졌다. 박유준과의 5년간의 연애, 그리고 3년간의 결혼생활까지 모조리 짓부쉈다.
곧장 송씨 일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비행기 사고 이후, 그녀의 엄마 최애라는 매일 밤 전화해서 딸아이를 위로했다. 혹여나 나쁜 생각이라도 할까 봐.
오늘 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살짝 망설이는 듯한 말투였다.
“엄마, 할 말 있으면 해요 그냥. 우리 사이에 숨길 거 없잖아요.”
그제야 최애라도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그게 말이야, 박 서방 49재가 겨우 지나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너도 어쨌거나 극복해야 하지 않겠어? 오늘 김씨 일가에서 결혼 얘기하러 왔단다. 예전에 약속했던 혼사 말이야.”
송씨 일가와 김씨 일가는 혼담이 오갔던 사이였다.
하지만 송씨 일가가 몰락한 후, 그 약속은 자연스레 잊혔다. 송서아는 자만추로 박유준을 만났고, 송씨 일가 또한 김씨 일가에 더는 이 혼담을 언급하지 않았다.
최애라가 말을 이었다.
“엄마도 알아. 금방 슬픔에서 벗어나긴 힘들지. 너무 재촉하진 않을게...”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서아가 단호하게 답했다.
“저 그 결혼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