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최애라의 목소리에 기쁨이 가득했다. 행여나 잘못 들었을까 봐 재차 확인하는 그녀. “뭐? 정말 그래 줄 거니?” 송서아는 바닥에 부서진 사진 액자를 흘깃 보더니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박유준은 죽었어요. 살 사람은 살아야죠! 저도 이제 열심히 살아볼래요.” 그랬다. 박유준은 이미 그녀 마음속에서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최애라는 딸의 대답을 듣고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오늘 이전까지 송서아는 남편의 죽음에 더는 살아갈 의미를 못 느꼈다. 최애라는 흥분된 나머지 목소리가 다 떨렸다. “그래, 서아야, 살 사람은 살아야지!” 깊은 밤, 야릇한 신음이 점점 더 켜졌다. 그건 마치 무딘 칼날처럼 송서아의 심장을 매정하게 난도질했다. 밤늦게 겨우 잠든 송서아, 동이 트려 할 때 별안간 박씨 저택에 구급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침실 문을 열자 박유준이 잔뜩 긴장한 채 허가윤을 안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송서아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랜 시간 함께 지내오며 박유준이 이토록 당황해하는 모습을 전혀 본 적이 없었다. 늘 침착하던 그였으니까. 아래층에서 가정부들이 수군거렸다. “큰 사모님께서 아침부터 속이 울렁거린다는 바람에 큰 도련님도 화들짝 놀라서 구급차 불렀지 뭐예요. 임신한 것 같다면서 얼른 검사받으러 갔어요. 도련님 얼굴에 화색이 감돌던데요?” 옆에 있던 또 한 명의 가정부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어젯밤 그 소리가 아래층에 있는 제 방까지 다 들렸어요. 한 달 내내 이러시는데 임신 안 되는 게 더 이상하죠.” 송서아는 나선형 계단에 서서 고급스러운 나무 난간을 손톱으로 긁었다. 그때 병원에서 전화가 오더니 송서아를 즉시 병원에 오라고 했다. 그녀는 역겨워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시어머니가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그녀를 갈궜다. “서아야, 유준이가 죽었지만 넌 여전히 우리 집안의 일원이야. 이제 우리 집안의 대가 끊길 위기라서 새 생명이 너무 소중하단다.” 민채원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백주현 선생님 임신 관련해서는 최고의 명의라고 들었는데 돈으로도 모셔오기 힘든 분이래. 너희 집안 의료계에 발이 넓잖아. 어떻게든 좀 연결해 줄 수 있겠지?” 송서아가 여전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민채원이 한 마디 덧붙였다. “서아야, 우리 집안에서 너한테 줄곧 후하게 해줬다. 물론 너희 집안까지도 많이 도왔지. 그때...” 그녀가 또다시 과거에 송씨 일가를 도왔던 일을 꺼내려 하자 송서아가 손을 흔들었다. “갈게요.” 전에 박씨 일가는 송씨 일가의 경제적 어려움을 도와준 적이 있다. 하지만 송씨 일가도 은혜를 잊지 않고 인정을 갚아왔었다. 민채원이 굳이 지금 또 그 이야기를 꺼내자 송서아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박유준은 안절부절못하며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이곳은 경원시 최고의 개인 병원이고 백주현 또한 산부인과 분야 최고의 명의였다. 돈으로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 그런 분 말이다. 송서아를 본 박유준은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와 손목을 꽉 잡았다. 너무 세게 잡은 나머지 손목이 부러질 듯 아팠다. “서아 씨, 드디어 왔네요! 우리 가윤이가 임신 초기라 태아 상태가 불안정하대요. 서아 씨 집안이랑 백주현 선생님 아는 사이라고 했죠?” 송서아는 빨개진 손목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박유준은 그녀가 통증에 민감해 아주 작은 충격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걸 너무 잘 안다. 전에 손잡을 때도 항상 조심스러운 편이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허가윤 배 속의 아이 때문에 이토록 당황해하며 송서아를 아프게 한 건 전혀 안중에도 없다. 그녀는 경멸의 미소를 지으며 차가운 시선으로 돌변했다. “아주버님, 방금 제 이름 부르셨어요? 전엔 항상 제수씨라고만 하더니.” 실은 송서아도 스스로 너무 한심했다. 박유준이 박서준 행세를 하며 돌아왔을 때 이미 허점투성이였지만 그녀는 사랑에 눈이 멀어 사랑하는 내 남편이 절대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할 거라 예상치 못했다. 어젯밤까지도 그녀는 일말의 의심조차 없었다. 박유준은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송서아가 눈치채지 못할 거라 여겼는지 다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가윤이가 급하게 병원에 실려 와서 제가 잠깐 정신을 놓았네요. 실례했어요 제수씨.” 송서아가 피식 웃었다. “그래요? 정신을 놓았다고요? 하긴, 한 달 내내 불타는 밤을 보내니 잠깐 피곤해질 수도 있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