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박은영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정말 태진 씨가 그랬다고요?”
“네.”
사실 조기현은 박은영이 너무 별로였다. 업무 능력이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과거에 더러운 수단으로 대표님의 침대에 기어올라 결혼을 강요했으니까.
이런 여자가 제일 역겹고 최악이다.
“대표님께서 오늘 여론을 종식시키기 전까지 팀장님 어디도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만약 해내지 못하면 로열에 남아있을 필요도 없겠죠!”
물론 박은영도 잘 알고 있다. 유태진은 그녀에게 일말의 감정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이혼을 앞두고 이런 일에 시달릴 줄이야.
명실상부 법적인 아내가 지금 그의 내연녀를 위해 여론을 종식시키라고?
박은영은 울화가 치밀었고 복통이 점점 심해져서 책상을 짚었다.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사원증이 한없이 우스워 보였다.
그녀는 사원증을 들고 줄을 돌돌 감으면서 쏘아붙였다.
“그렇죠, 로열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겠죠.”
박은영은 사원증을 다시 엎어놓았다.
“저 이번 일 못 해요. 이만 사표 낼게요!”
곧이어 어젯밤에 작성한 이혼합의서까지 사직서와 함께 제출했다.
절차가 복잡해서 아직 유태진에게 닿진 못했겠지만 오늘 서연주에 관한 이 업무는 도저히 맡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서연주 씨에 관한 일로 절 찾아오지 마세요. 태진 씨더러 다른 사람 안배하라고 하세요. 이 큰 로열에 저 하나 빠진다고 못 돌아갈 건 없잖아요.”
조기현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은영이 사표라니?
대표님께 접근할 수 있는 이런 일자리를 정말 포기한단 말인가?
이 또한 일부러 물러서는 수법으로 대표님을 유혹하려는 건 아니겠지?
조기현은 맨 위층으로 돌아갔다.
한편 유태진은 일정이 꽉 찼다. 이제 막 동인 테크 지현서 대표를 만나러 가려던 참인데 조기현이 안으로 들어왔다.
“대표님, 여기 동인 테크 계약서입니다. 한번 확인해보세요.”
유태진이 계약서를 쭉 훑어보았다.
“연주 일은 홍보팀에서 잘 처리하고 있어?”
조기현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게... 박 팀장님이...”
“박 팀장이 왜?”
“이번 일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리고 방금 사표 냈어요. 앞으로 서연주 씨에 관한 일로 더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어요...”
유태진은 계약서를 펼쳐보다가 싸늘한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회사 나와서 사표 냈다고?”
“원래 오늘 휴가인데 제가 임시로 불러냈거든요. 인사팀에서는 박 팀장님이 어제 이미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하네요.”
“휴가?”
유태진은 사표 말고 휴가에 관해 물었다.
이에 조기현은 대표님의 속내를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꽤 중요한 일이신가 봐요. 박 팀장님은 3년 내내 휴가를 낸 적이 없었잖아요.”
이 점은 유태진도 잘 알고 있다.
박은영은 차갑고 소외감이 느껴지지만 실은 대인관계나 업무에 대해 누구보다 열심히 임하고 있다. 그녀는 똑똑하고 수완도 좋아서 2년 사이에 홍보팀 팀장 자리까지 올랐다.
그런 그녀가 휴가를 내고 이제 또 사직서까지 제출하는 건 그야말로 흔치 않은 일이다.
유태진은 짙은 눈길로 잠시 고민에 빠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표 처리할 수 있어. 단 연주 일은 반드시 박 팀장이 직접 처리해야 해! 만약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서 업계에 소문이라도 난다면 뒷감당은 혼자 하라고 해.”
조기연은 실로 의아했다.
대표님은 박 팀장이 하루빨리 로열 그룹을 떠나길 원하실 텐데 이제 와서 왜 갑자기 안 놓아주는 걸까?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아 그리고 대표님, 이건 팀장님께서 대표님께 드리는...”
유태진은 전화를 받으면서 그에게 손을 휘둘렀다.
“하던 대로.”
하던 대로라는 건 박은영의 모든 요구를 무시하고 구석에 내팽개친다는 뜻이다.
전에 그녀는 사람을 시켜서 옷이랑 넥타이, 커프스단추, 수제선물을 보내왔고 또한 로열 그룹의 핵심 기술 프로젝트가 드론 관련이라 손수 모형을 만들어 보내며 유태진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지만 이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사무실 안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캐비닛에 처박아두고 있다가 가끔 급할 때마다 꺼내서 쓰곤 했다.
조기현은 이번에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미처 개봉하지 않은 서류를 캐비닛에 넣었다.
‘애쓴다 박은영, 이래봤자 무슨 소용이야?’
그가 속으로 실실 비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