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박은영은 수중의 업무를 다 마무리한 후 조기현으로부터 통보를 받았다.
조기현은 유태진의 분부를 다시 한번 반복했고 순간 박은영은 이 남자의 속내를 알아챘다.
서연주와 유태진은 어디까지나 불륜관계이니 이번에 서연주는 내연녀라는 꼬리표를 뗄 수가 없다.
이번 일을 박은영에게 맡기는 건 유태진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혹시라도 나중에 누군가가 과거의 일을 들추어낸다면 본처인 박은영이 친히 ‘명분을 바로잡아’ 주었기에 서연주는 내연녀의 꼬리표를 떨쳐낼 수 있고 이번 일로 인한 의심과 비난도 피할 수 있다.
‘애쓴다, 유태진! 서연주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 구나!’
앞서 이 남자가 뒷감당은 혼자 하라고 했던 말은 그녀를 향한 협박이나 다름없다. 만약 서연주의 일을 해결하지 않고 로열 그룹을 떠난다면 나중에 어떤 회사도 감히 그녀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유태진은 대놓고 그녀의 밥줄을 끊고 있다.
3년 동안 조신한 아내로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그에게 시집온 날부터 과거와의 모든 인연을 단호하게 끊었지만 돌아온 건 한 치의 진심도 없었다.
박은영은 너무 지친 나머지 입꼬리를 씩 올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나 병가 냈어요. 만약 내가 아픈 상태에서 억지로 업무 처리하게 강요한다면 노동법 위반으로 법원에 기소하는 수가 있어요!”
이혼하고 사표를 낸 마당에 유태진의 기분 따위 고려할 필요가 있을까?
퇴근 후 박은영이 차에 타자마자 주명훈한테서 카톡이 하나 도착했다.
[도영이 출소했어. 집에서 가족 모임 열 텐데 너도 돌아올래?]
질문형이지만 주명훈은 ‘못된 딸’이 돌아와서 분위기만 망칠까 염려하고 있었다. 이 점을 박은영도 너무 잘 안다.
그해 박은영과 주도영의 일은 주명훈에게 치욕을 안겨주었다. 그는 무작정 딸아이가 품행이 단정하지 않다고 여겼다. 유씨 일가라는 재벌가에 시집가서 그나마 이용 가치가 있었으니 망정이지 일찌감치 그녀와 연을 끊고 집에서 내쫓았을 것이다.
다만 주도영은 한때 그녀에게 제일 중요한 사람이다.
박은영은 한참 고민하다가 혈색이 없는 얼굴에 연한 화장을 하고 주씨 일가 별장으로 출발했다.
주도영만 아니면 그녀는 더 이상 주씨 일가와 관계를 맺지 않았을 것이다.
“은영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그녀를 본 도우미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구겼다.
이에 박은영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몇 년 전부터 이곳은 그녀의 집이 아니고 도우미마저 이토록 얕잡아보면서 반겨주지 않는다.
“누가 와? 은영이?”
주해린이 아래층으로 내려오며 박은영을 보자 야유의 미소를 날렸다.
“뻔뻔스럽긴! 도영 오빠가 돌아오자마자 이리로 달려오는 거야? 기어코 온 가족 기분을 잡치게 해야 속이 시원하겠어?”
주해린은 주명훈이 불륜을 저질러서 태어난 사생아로 박은영과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났지만 지금은 어느덧 정정당당한 딸인 양 행세하며 비아냥거리고 있다.
“그러는 넌 그토록 고상하면 일단 우리 엄마 방에서 나가줄래?”
박은영이 차분하게 반박했다.
이 집은 당시 박은영의 엄마가 그림을 고가에 팔아서 마련한 집인데 주명훈이 불륜녀 양지원과 둘 사이에 낳은 딸 주해린을 끌고 와서 편하게 지내고 있다.
주해린은 박은영의 엄마가 남긴 물건을 향수하며 대체 무슨 자격으로 이토록 거만을 떠는 걸까?
“야!”
순간 안색이 어두워진 주해린이 뭔가 생각난 듯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래, 어디 한번 쭉 잘난 척 해봐. 이따가 계속 잘난 척해라.”
“이분은?”
문득 호기심에 찬 여자의 목소리가 둘의 날 선 대화를 끊었다.
거실에서 인기척을 들은 두 남녀가 나란히 걸어 나왔다. 장민지는 박은영을 보더니 남자친구 주도영의 옷을 잡아당겼다.
“너무 이쁘다.”
한편 주도영은 박은영을 힐긋 보고는 다시 여자친구에게 시선을 옮기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얘도 해린이처럼 내 동생이야. 왜? 동생까지 질투하게?”
장민지는 수줍은 듯 빨개진 얼굴로 그의 가슴팍을 두드리다가 박은영에게 말했다.
“도영 오빠 여동생이 두 명일 줄은 몰랐네요. 이름이 뭐예요?”
주도영이 여자친구를 집까지 데려올 줄이야. 박은영은 멍하니 두 사람을 쳐다봤다.
부모님께 소개시킨다는 것은 장민지와 아주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는 걸 뜻한다.
한때 박은영과 결혼하려고 모든 걸 포기하려던 그 주도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박은영은 그에게 주해린과 똑같은 여동생일 뿐이다.
그녀는 목이 바짝 타들어 갔다.
“박은영이에요.”
장민지는 놀란 기색이 역력하더니 역시나 박은영과 주씨 일가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질문을 이어갔다.
“왜 주씨가 아니죠?”
박은영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장민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민지에요. 앞으로...”
“너한텐 새언니야.”
문득 주도영이 한 마디 끼어들며 박은영을 쳐다봤다.
“진지하게 만나는 중이야. 앞으로 새언니라고 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