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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은지야, 지난번에 말한 것 생각해 봤니? 할아버지 병세도 위중하고 나랑 네 아버지에겐 너 하나뿐인데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 그룹을 잇겠다는 마음이 없어?” 텅 빈 방 안, 심은지는 손에 붓을 쥔 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어머니 최미숙의 지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어스름한 빛이 깃든 공간에서 심은지는 그림 속 세 식구의 마지막 선을 덧그렸다. 이번에도 설득은 헛되리라 생각하던 순간,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좋아요.” 멈칫하던 최미숙은 딸의 뜻밖의 대답에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이니? 정말 돌아오기로 결심한 거야?” “네.” 심은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담담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정리해야 할 일이 있어요. 마무리가 끝나면 보름 안에는 돌아가도록 할게요.” 그녀는 몇 마디를 덧붙이고 전화를 끊었다. 방을 나선 심은지는 아래층 거실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곧장 소파에 앉아 있는 강우빈에게 닿았다. 강우빈의 이목구비는 뚜렷하되 예리하지 않아 온화한 품격과 여유가 느껴졌다. 단정한 셔츠와 정장 바지, 맨 위 단추까지 꼼꼼히 잠근 모습에는 고독한 품격이 배어 있었다. 그는 심은지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택한 남편, 경성 강호 그룹의 대표 강우빈이었다. 언제나 무표정하다 하여 ‘얼음 왕자’라 불리던 강우빈은 지금 한서연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그 옆에는 다섯,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아이가 한서연의 품에 파고들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서연 이모, 나 생선구이 먹고 싶은데 해주면 안 돼요?” 한서연은 강은우의 코끝을 살짝 누르며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해줄게.” 강은우의 눈빛이 반짝이며 기분 좋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연 이모 정말 좋아요. 엄마랑 완전히 달라요. 엄마는 늘 많이 못 먹게 하거든요.” 말을 마친 강은우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면 오늘은 은우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 한서연이 웃으며 달래자 강은우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 이모가 너무 좋아요. 이모가 내 친엄마였으면 좋겠어요.” 한서연의 웃음은 더 깊어졌고 위층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던 심은지의 가슴은 서늘하게 저렸다. 강은우는 어릴 때부터 식탐이 강했다. 심은지가 음식을 단속한 것은 단지 배탈이 날까 염려했기 때문인데, 그 사소한 진심조차 왜곡되어 돌아오는 듯했다. 심은지는 더 이상 그 광경을 지켜볼 수 없었다. 분명 강우빈과 강은우, 그리고 자신까지 포함한 세 사람이 한 가족일 텐데 지금 눈앞의 풍경은 오히려 자신이 이방인인 양 느끼게 했다. 심은지는 다시 방으로 몸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가 다가오고 문이 열리며 세련된 화장에 온화한 미소를 띤 한서연이 들어왔다. “언니, 우리 함께 은우 생일 축하하러 가요.” 한서연은 원래 심은지 밑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가난한 집안 출신에 능력도 평범했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시집가야 한다며 호소하는 처지가 안쓰러워 심은지가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인턴이 결국 가정을 무너뜨리는 장본인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한서연은 의도적으로 심은지를 흉내 내며 강호 그룹의 안주인 자리를 넘보았다. 심은지가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고 한서연은 자연스레 남편과 아들 곁에 자리하고 있었다. 심은지는 가식적인 한서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스스로 늑대를 집 안으로 들인 자신의 어리석음에 이를 갈았다. “몸이 별로 안 좋아서 안 내려갈래.” 심은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자 한서연은 순진한 얼굴로 곱게 권했다. “언니, 그래도 언니가 은우의 친엄마잖아요. 은우는 엄마의 축복이 필요할 텐데.” 심은지는 눈썹을 찡그리며 망설이다 결국 한숨을 쉬었다. 강은우는 아직 어린아이였고 어른들의 일로 아이가 상처받아서는 안 되었다. 필경, 심은지는 강은우의 엄마였고 아들의 생일을 축복해 주는 것 또한 그녀의 의무였다. 그녀는 붓을 내려놓고 한서연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무시당한 한서연은 순간 미소가 굳고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십 년 전, 심은지는 스스로 단련이 필요하다며 강호 그룹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강우빈을 만났다. 두 사람은 티격태격 다투면서도 결국 결혼을 결심했고 심은지는 집에서 마련한 혼처를 뿌리치며 부모와 단절까지 감수하면서도 그를 선택했다. 십 년 동안 심은지는 그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멋진 남편과 사랑스럽고 총명한 아들까지 있었으니, 그녀는 한때 자신이 제일 행복한 여자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한서연이 남편과 아들 곁에서 환히 웃고 있는 모습이 모든 것을 뒤바꿔 놓았다. 심은지는 젓가락을 들었으나 불현듯 메스꺼움이 치밀어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토악질했다. 강우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일어나 심은지를 살피려 하는 순간, 한서연이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팔을 잡고 말했다. “강 대표님, 언니 왜 저러는 거예요?” 한서연의 걱정 가득한 눈빛에 강우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요즘 늘 저래. 별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심은지를 바라보며 조롱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엔 또 왜 그래? 감기야? 아니면 음식이 입에 안 맞아?” 심은지는 침묵하며 입술을 닦았다. ‘입덧이라고 하면 믿어줄까? 어차피 떠날 예정인데 말해서 뭐 해. 괜히 저 두 사람 사이에 문제 일으키지 말자.’ 일개 비서였던 한서연은 거리낌 없이 자기 상사 강우빈을 비난했다. “강 대표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언니 정말 몸이 안 좋나 봐요. 요즘 살도 많이 빠졌잖아요.” 한서연은 따뜻한 물 한 컵을 심은지에게 건넸다. “언니, 물 좀 마셔요.” 가식적인 한서연의 태도에 심은지는 속이 더 울렁거려 고개를 돌린 채 그녀를 밀쳐냈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밀쳤을 뿐인데 한서연은 휘청거리며 물잔을 떨어뜨렸고 뜨거운 물이 한서연의 손등에 쏟아졌다. “아!” “서연아!” “이모!” 강우빈과 강은우가 동시에 한서연에게 달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살폈다. 하얀 손등은 이내 벌겋게 달아올랐고 강은우는 금세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 괜찮아요? 아프죠?” 한서연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은우야. 이모가 부주의했을 뿐이야.” 강우빈은 화가 치밀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심은지를 노려보며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넌 또 왜 이래!” 심은지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한서연의 득의양양한 표정과 그녀를 보호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 아들의 모습에 심은지는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그런 게 아니야.” 그러나 강우빈은 믿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정 주치의가 찾아왔고 강우빈은 한서연을 자기 가슴에 기대게 한 채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심은지를 보며 말했다. “은지야, 너 변했어. 예전의 너는 질투 따위로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잖아.” ‘변했다고? 그래, 변했지.’ 십 년 전의 그녀는 임신으로 뱃살이 트지 않았고 밤낮으로 일해 얼굴이 칙칙하지도 않았다. 강우빈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했다면 새로 들어온 인턴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심은지는 이제 너무 지치고 힘들어 변명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위층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 심은지는 다시 한번 한때 자신의 사랑이자 심장이었던 남편과 아들을 바라보았다. 강우빈과 강은우는 여전히 한서연 곁에 모여 있었고 그들의 모습은 한 가족처럼 다정해 보였다. 심은지는 쓸쓸히 고개를 저으며 조심스레 자기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휴대폰에 떠나기 위한 카운트다운을 설정한 뒤 미련 없이 방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이제 저 세 사람 사이에서 사라져 주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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