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Open the Webfic App to read more wonderful content

제2화

밖에서 들리던 떠들썩한 소음은 차츰 잦아들었다. 심은지는 귀마개와 안대를 단단히 하고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개의치 않은 채 아침이 밝을 때까지 깊이 잠들었다. 이미 집안의 사업을 잇기로 결심했으니 이곳의 일은 마무리해야 했다. 강은우를 낳은 뒤로는 회사에 나가는 일이 드물었지만 강우빈이 가업을 잇던 초창기에는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곁에서 함께 싸워왔다. 오늘날 강호 그룹이 전국 최고 실적을 올리게 된 데에는 심은지의 공도 적지 않았다. 그 덕분에 출근하지 않아도 매년 거액의 배당금이 그녀에게 돌아왔다. 이른 아침, 심은지는 거울 앞에 서서 물끄러미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자연스레 웨이브 져 어깨를 덮고 있었고 갸름하게 다듬어진 얼굴과 예쁘장한 눈에는 웃음기가 사라진 상태였다. 가정주부로 살며 밤낮없이 고생했지만 아름다운 미모는 여전했다. 다만 임신으로 인한 입덧과 가족의 냉대로 정신적 소모가 심해 눈빛은 빛을 잃고 공허하게 비어 있을 뿐이었다. 강호 그룹의 최고층. 심은지는 사직서가 출력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뒤편에서 들려오는 직원들의 대화가 귀에 스쳤다. “한서연 인스타 봤어요?” “아직이요. 왜요? 이번엔 뭘 올렸는데요?” “사진 엄청 많이 올렸던데요. 누구 생일 파티 같던데 봐봐요.” 낄낄대던 직원들은 고개를 들다가 심은지와 눈이 마주치자, 순간 웃음을 거두었다. “심, 심 비서실장님?” “비서실장님, 모처럼 회사에 나오셨네요.” 심은지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고 직원들은 허둥지둥 인사만 남기고 흩어졌다. 뒤이어 속삭이는 말들이 귀에 들어왔다. “기분 잡치게 회사에는 왜 나온 거래요?” “이미 사모님 자리까지 차지했으면 됐지 굳이 왜 회사에 나와서 잘난 척하는 건지.” “쳇, 강 대표님이랑 사이도 별로라던데요. 곧 이혼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수군거림에도 심은지는 무심했다. 회사에서 그녀는 늘 인기가 없었고 이런 상황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할 때 만약 강우빈이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는 그 남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심심하던 차에 휴대폰을 열어 인스타그램을 확인하자 한서연이 올린 아홉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 장은 전날 강은우의 생일 파티 장면이었는데 화려한 장식과 거대한 3단 케이크가 중앙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심은지의 시선을 끈 것은 병원에서 찍힌 사진이었다. 크기가 다른 세 손이 포개진, 그럴싸한 가족 연출이었다. 그저 물에 잠깐 뎄을 뿐인데 또 병원에 갔다고 올린 모양이었다. 심은지는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댓글을 내려다보니 온통 축복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아이 생일이었나 봐요? 너무 행복해 보이네요.] [또 연애 자랑이네. 남자 친구가 도대체 누구야? 친한 친구한테도 안 보여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이 함께라면 행복한 일이죠.] 심은지는 한서연이 이런 글을 올리는 이유가 단순히 자신의 질투심과 분노를 일으켜 강우빈과 다투기를 바라는 마음임을 잘 알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선을 넘는 한서연의 행동을 절대 참지 못했을 것이고 남편과 아들이 자신을 집에 버려두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을 모방하는 위선적인 여자를 보살피며 병원에 갔다는 사실도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떠날 결심을 한 그녀에게 그런 일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심은지는 입꼬리를 올리며 한서연이 올린 사진을 두 번 터치했다. 심은지는 사직서를 손에 쥔 채, 곧장 비서실로 들어가 현재 강우빈을 보좌하는 수행 비서에게 내밀었다. 심은지가 그저 허세를 부리러 왔다고 수군거리던 비서실 사람들은 그녀가 사직서를 내밀자 모두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잘못 본 거죠?” “비서실장님이 방금 사직서를 제출한 거 맞아요?” 수행 비서는 굳어진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사모님, 대표님은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십니다. 사직서는 회의 후에 전달하는 게 어떨까요?” “괜찮아요. 이름뿐인 비서실장이잖아요. 당신 권한으로 충분히 승인할 수 있을 텐데, 뭐 하러 번거롭게 대표님한테까지 올려보내요.” 심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주위에서는 금세 탄식 섞인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부부 사이가 안 좋다더니 소문이 사실인가 봐요? 설마 한 비서님 때문은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한 비서님은 가족이 있잖아요.”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인스타에 나온 그 손, 강 대표님이잖아요. 손목에 차고 있던 롤렉스 시계 못 봤어요? 그거 한정판이에요.” “맞아요. 비서실장님이 출산 휴가를 낸 뒤로 모든 업무를 한 비서가 맡았잖아요.”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건 어쩌면 자리를 내어주겠다는 거겠죠.” 예전 같았으면 심은지는 이런 말에 가슴이 무너져 밤마다 이불 속에서 눈물을 훔쳤을 테지만, 지금은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담담하게 웃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지난 십 년 동안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 강호 그룹의 앞날에 늘 번영이 함께하길 바랄게요.” 그녀의 말에 수군거리던 직원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심은지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책상에 쌓여 있던 물건들을 정리했다. 10년 차 베테랑 직원의 자리는 각종 물건으로 가득했다. 입사 초에 샀던 참고서부터 강우빈의 습관을 기록했던 수많은 노트와 메모장까지. 노트를 펼쳐보자 위에는 또박또박 정교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첫째. 매일 아침 핸드 드립 커피 한 잔 내리기.] [둘째. 지각은 절대 금물.] [셋째. 여자의 모든 향수를 다 싫어함.] 또박또박 써 내려간 메모장에는 한 줄 한 줄마다 그녀의 땀과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비서라는 직함을 가볍게 여겼고 그저 남자의 장식품쯤으로 여기며 몸만 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일 밤늦게까지 계약서를 검토하고 발표 자료를 만들며 경쟁사를 철저히 조사했던 그녀의 노력을 강우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노력을 지켜봤기에 손끝조차 닿을 수 없던 고귀한 왕자님께서 그녀에게 마음을 주었고 두 사람은 결혼까지 이르렀다. 심은지는 평생 강우빈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많이 이해해 주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국 그것도 착각이었다. 십 년의 세월이 남긴 것은 무너진 신뢰와 허무뿐이었다. 짐을 정리하던 중 회의가 끝나고 한서연이 먼저 걸어 나왔다.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나오던 한서연은 심은지를 보자 얼굴이 굳었다. ‘저 여자가 여기 왜 와 있는 거지? 인스타에 올린 사진을 보고 따지려고 온 거야?’ 자기 생각대로 모든 일이 풀린다고 생각한 한서연은 자리로 돌아가 흥분되는 마음으로 폭풍전야를 기다렸다. 하지만 겉으로는 고개를 숙인 채 눈시울을 붉히고 마치 세상에서 가장 큰 억울함을 당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회의실에서 나와 비서실을 지나가던 강우빈도 심은지를 발견했다. 그녀의 자리는 대표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한때 부부의 애정을 증명하듯 특별히 마련된 자리였다. 하지만 강우빈은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심은지를 보자 불편하고 불쾌한 기색이 앞섰다. 기분 좋게 책을 넘기며 얕은 웃음을 띠고 있는 심은지를 보니 더욱 짜증이 치밀었다. 그의 시선은 무의식중에 한서연을 향했고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휴지를 쥐고 훌쩍이고 있었다. “들어와.” 강우빈이 심은지의 책상을 두드리며 짧게 명령하자 심은지는 고개를 들어 태연히 대답했다. “그래.” 대표실에 들어선 그녀를 향해 강우빈이 내뱉은 첫마디는 차가웠다. “회사는 이제 네가 필요 없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앞으로 회사에 나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 Webfic, All rights reserved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