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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5분 후, 검은색 레인지로버가 쏜살같이 병원으로 향했다. 뒷좌석에 앉은 강우빈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품 안의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의 눈꺼풀이 살짝 움직이자 그는 바로 알아챘다. “은지야, 일어났어?” 심은지는 강우빈에게서 풍기는 희미한 향기를 맡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강우빈의 무릎에 앉아 그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 강우빈의 깊은 눈이 그녀와 마주친 순간, 남자의 얼굴에 잠깐 기쁨이 스쳤다. “어쩌다...” 그러나 심은지의 눈빛에서 냉담함을 읽고 표정은 곧 가라앉았다. 그녀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몸을 옮겨 그와 거리를 두려고 했다. 강우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심은지가 변덕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심은지, 네가 몇 살인데 알레르기 있는 걸 알면서 병원도 안 가? 꼭 나랑 은우 앞에서 쓰러져야 직성이 풀려? 우리가 종일 네 주위만 맴돌아야 만족하겠어?” 최근 며칠 동안 심은지의 냉담한 태도에 화가 난 듯 강우빈의 걱정은 퉁명스러운 잔소리로 바뀌었다. 심은지는 양손을 꽉 쥐고 창백해진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그녀의 모습을 본 강우빈은 더욱 불쾌해져 그녀의 턱을 잡아 돌려 자신을 보게 했다. “말해! 몸까지 망쳐가며 뭐 하겠다는 거야? 이제 나랑 은우가 직접 병원에 데려다주니까 또 여기서 냉담한 척하려고?” 심은지는 이를 악물고 강우빈의 손을 밀쳐냈다. 그녀는 자조 섞인 웃음을 띠며 말했다. “뭐 하는 거냐고? 우빈아, 내가 꽃 알레르기 있다는 걸 넌 잊은 거야,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거야?” 강우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원래 굳어 있던 얼굴은 더 차가워졌고 심은지를 바라보는 눈빛은 그녀의 억지를 받아들이는 듯했다. 이제 와서 말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심은지는 갑자기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아무 의미 없었다. 차 안에 있는 두 시선을 느낀 심은지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앞좌석에서 한서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끄러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고 강은우는 여전히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심은지와 눈이 마주치자 은우는 입술을 불만스럽게 삐죽였다. 마치 그녀가 공연히 호들갑을 떨어 사람들을 방해한다고 탓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부자의 첫 반응은 그녀의 알레르기로 정신을 잃은 심각한 상황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호들갑을 떨며 두 사람을 쥐락펴락 든다며 비난했다. 심지어 은우는 혹여 자신이 한서연에게 화를 낼까 봐 불안한 듯 말없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언니 괜찮아요?” 한서연은 눈물이 맺힌 채 다정하게 물을 건네며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곧 병원에 도착할 거예요. 저랑 강 대표님, 은우가 함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짝.” 심은지는 뻗은 그녀의 손을 인정사정없이 쳐냈다. 한서연은 신음을 삼키며 아픔을 참았지만 하얀 손등은 금세 붉게 부어올랐다. “엄마, 왜 자꾸 서연 이모 괴롭혀요? 난 엄마가 정말 싫어요!” 강은우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갈라져 심은지를 향했다. 그러고는 한서연의 손을 꼭 잡고 입김을 불며 말했다. “호호. 서연 이모 아픈 거 다 날아가라.” 심은지는 입술을 떨며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있자니 칼끝이 심장을 파고드는 듯 고통스러웠다. 어릴 적 강은우는 활달해서 자주 뛰다 넘어지거나 부딪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통통한 뺨을 부풀린 채 억울하게 울며 그녀 품에 안기곤 했다. 그러면 심은지는 다친 부위를 입김으로 달래주며 말했다. “호호. 엄마가 불어주면 아픈 거 다 날아갈 거야.” 강은우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 그녀 품에 매달려 애교를 부리다 다시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자신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게 아끼던 아들은 다른 여자의 손을 붙잡고 ‘엄마’라고 여기며 위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심은지는 체념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부자는 여전히 눈치채지 못했다. 한서연의 눈빛에 담긴 은근한 우월감과 심은지와 눈이 마주쳤을 때의 노골적인 도발을. “괜찮아, 은우가 최고네. 서연 이모 이제 안 아파. 언니도 살살 민 거야.” 한서연은 눈가가 붉어진 채 강은우가 자기 손을 꼭 쥐고 주무르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이내 손등을 등 뒤로 숨기고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강우빈을 힐끗 바라봤다. “심은지, 당장 서연에게 사과해.” 그의 차갑고 짜증 섞인 목소리에 심은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강우빈을 돌아봤다. “피해자인 나보고 사과하라고?” 그녀는 어이없어하며 비웃었다. “한서연이 날 꽃 알레르기로 쓰러지게 만든 건데, 내가 고마워하기라도 해야 해?” 한서연은 처음부터 그녀 곁에서 일을 도왔고 심은지가 직접 하나하나 가르친 사람이었다. 그녀가 꽃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까 별장에서 은은하게 퍼지던 향기를 맡았을 때부터 심은지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강 대표님, 언니한테 사과하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저, 오해받고 있다는 거 알아요.” 한서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더는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는 듯했다. “은지 편들지 마!” 강우빈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가 다 받아주니까 이러는 거잖아.” 그 말의 속뜻을 심은지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역시 자신이 너무 받아준다는 뜻일까? 또다시 그는 망설임 없이 한서연의 편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명목상의 아내일 뿐이었고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이었다. 심은지는 갑자기 복부가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아릿하고 묵직한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이!’ 그녀는 눈에 띄지 않게 아랫배를 감싸 쥐고 입술을 세게 깨물며 더는 변명하지 않기로 했다. 차 안의 공기는 싸늘하게 굳어졌고 마침내 차가 병원에 도착했다. 강우빈은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언니, 몸이 중요해요. 화내지 말고 몸 상하지 않게 조심하세요.” 한서연의 말에 담긴 은근한 도발을 어린 강은우만이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그저 서연 이모가 너무 착해서 냉정하고 무정하기만 한 엄마를 걱정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여겼다. 심은지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 여전히 아랫배를 감싸고 차갑게 한서연을 노려보았다. “괜히 착한 척하며 널 도와주다가 이렇게 된 거야. 어쩌겠어? 내가 감수해야지.” 그리고 차 문을 열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앞으로 몸 사리는 게 좋을 거야.” 강우빈의 아내가 된다는 게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서연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심은지만 무너뜨리면 자신이 강우빈 곁의 유일한 여자가 될 것이라 믿고 있었고 아내의 자리를 차지하는 건 시간문제라 여겼다. 심은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몇 걸음도 채 가지 못하고 현기증에 휘청거렸다. 쓰러지려는 순간, 강우빈이 재빨리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의사 선생님!” “사람 불러!” 강우빈은 품 안에서 미세하게 떨고 있는 심은지의 몸을 느낄 수 있었다. 손바닥만 한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 순간 강우빈의 가슴에 알 수 없는 불안이 덮쳐왔다. 곧 병원 간호사가 구급차를 밀고 와 그녀를 응급실로 옮겼다. “환자는 알레르기 증상이 위독합니다. 환자분, 약물 알레르기 이력 있으십니까?” 의사의 익숙한 목소리가 긴박하게 울려 퍼졌다. 심은지는 아랫배를 움켜쥔 채 힘겹게 속삭였다. “의사 선생님, 저 임신했어요. 약은 쓸 수 없어요.” “임신했다고요?” 의사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증상이 심각합니다. 즉시 약을 먹지 않으면 신경이 마비되어 질식사할 수 있습니다.” “태아 발달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일반적인 치료만 해주세요.” 심은지는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간절히 부탁했다. “그리고 제 남편에게는 임신 사실 알리지 말아 주세요.” “그건 규정에 어긋납니다. 혹시라도 결과가 잘못되면...” “저는 한성 그룹의 딸입니다. 어떤 결과가 생기든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제발...” 끝내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심은지는 수술대 위에서 의식을 잃었다. 응급실 밖, 불이 켜진 수술실을 바라보던 강우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심은지는 단순한 알레르기일 뿐이다. 별일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다독이듯 속으로 중얼거리며 억눌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무심코 옷자락을 움켜쥔 손끝에 축축한 감촉이 묻어났다. 강우빈은 고개를 내려다보다가 동공이 급격히 수축했다. ‘피?’ 그것은 분명 심은지의 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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