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손가락 끝에 묻은 핏빛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끈적거리는 감촉이 피부에 스며드는 듯했고 강우빈은 숨이 막혀 왔다.
그의 불안한 반응을 눈치챈 강은우가 고개를 들었다.
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이 금세 창백해지며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엄마가 죽는 건 아니죠?”
“닥쳐!”
순간, 강우빈의 얼굴이 굳어졌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순간,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섬뜩한 냉기가 번졌다.
강은우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두 발짝이나 뒤로 물러서며 겁에 질린 눈으로 한서연의 곁에 바싹 붙었다.
“서연 이모.”
아빠가 자신에게 소리친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한서연은 입술을 달싹이며 강우빈에게 아이에게 너무 심하게 대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차갑게 굳은 얼굴을 보고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대신 강은우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으며 불이 켜진 응급실을 노려봤다.
‘왜 피를 흘리는 거지? 설마 임신?’
지난 몇 년 동안 강우빈 곁에서 묵묵히 그를 지키며 심은지를 서서히 지워버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최근에는 일부러 오해를 만들었고 강우빈과 가까운 척하며 그녀를 도발해 함정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강우빈은 주저 없이 자신 편을 들어주었다.
그래서 확신했다. 강우빈은 이미 심은지에게 싫증이 났을 거라고.
그런데 지금 그의 모습은 뭔가 달랐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응급실 문만 바라보는 강우빈의 표정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엔 심은지만 보이고 있었다.
한서연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하필 이런 때에 임신이라니. 말도 안 돼. 아니, 설령 임신했다고 해도 절대로 아이를 낳게 두진 않을 거야. 강우빈은 내 거야. 강우빈의 아내 자리도 내 거라고.’
그 순간에도 강우빈은 몇 초마다 수술실 불빛을 불안하게 힐끗거리며 심은지의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강우빈의 마음은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지난번 이렇게 병원 앞에서 애타게 시간을 보낸 것은 6년 전, 심은지가 강은우를 낳았을 때였다.
‘잠깐!’
그는 손가락에 굳어 붙은 핏자국을 멍하니 만지작거리다가 최근 며칠 동안 심은지가 구역질하며 토하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반응은 강은우를 임신했을 당시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강우빈이 마침내 참을성을 잃어갈 즈음, 응급실 위의 표시등이 꺼지고 문이 열렸다.
간호사들이 침상 위에 누운 심은지를 밀며 수술실에서 나왔다.
“은지야!”
강우빈은 긴 다리를 성큼 뻗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심은지는 창백한 얼굴로 힘겹게 그를 힐끗 보더니 곧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의사 선생님, 제 아내가...”
“환자분은...”
의사가 말을 꺼내려 하자 심은지는 절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의사는 잠시 미간을 찌푸린 뒤 짧게 전했다.
“환자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가족분들이 환자의 알레르기 유발 물질을 반드시 조심해야 합니다.”
말을 마친 그는 차갑게 돌아서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가 버렸다.
남은 간호사가 심은지를 병실로 옮겼다.
강우빈은 병실까지 따라갔고 침대 위에서 눈을 감은 채 자신을 철저히 외면하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낮게 물었다.
“은지야, 혹시 또 임신한 거야?”
그는 손을 들어 보였다. 손가락 끝에는 여전히 선명한 핏빛이 남아 있었다.
심은지는 그의 목소리에 억지로 눈을 뜨며 얼굴을 찡그린 채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아니야.”
강우빈은 한참을 기다려 겨우 돌아온 짧은 대답을 듣고 깊게 찌푸린 미간을 풀지 못했다.
“그럼 이 피는 뭐야?”
“생리.”
심은지는 짜증 어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알레르기 증상 때문에 아직도 온몸이 불편한데 강우빈은 집요하게 캐묻기만 했다.
그가 이렇게 걱정하는 모습을 예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심은지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리며 몸을 돌려 강우빈에게 등을 보였다. 그러면 그가 더 이상 묻지 않고 포기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강우빈은 반대쪽으로 걸어와 그녀의 시선을 가로막으며 낮게 물었다.
“생리라고? 그럼 며칠 동안 구역질하고 토했던 건 또 뭐야?”
심은지는 눈을 감아버렸다. 더는 대답하지 않고 침묵으로 무시하려 했다.
그러자 강우빈은 그녀를 안아 올리려 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산부인과 검사를 받으러 가자!”
“강우빈!”
심은지는 격하게 그를 밀어내며 차갑게 외쳤다.
“넌 내가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그 순간, 병실 문가에서 한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 대표님, 은지 언니는 생리 중인 것 같아요. 요즘 감정 기복이 심한 것도 다 그 때문일 거예요.”
한서연은 강은우를 안은 채 한참 동안 문밖에서 상황을 엿보다가 강우빈이 심은지를 억지로 데리고 산부인과로 가려 하자 급히 들어왔다.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심은지가 임신했을 리 없었다. 임신했다면 강우빈의 관심을 붙잡기 위해서라도 진작 검사를 받으러 갔을 테니까.
그녀가 이번에 왜 이렇게까지 버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서연은 오히려 흥미롭게 지켜볼 생각이었다.
한서연이 설명해 주자 강우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더 차가워졌다.
그럼 지난 며칠 동안 심은지가 보여준 구토는 전부 거짓이었단 말인가?
검사를 요구하니 겁을 먹고 발뺌하는 건 자신이 임신하지 않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건가?
강우빈의 표정은 다시 얼음처럼 굳었다.
“괜찮으면 짐 싸서 퇴원해. 나는 병원에서 너와 낭비할 시간 없어.”
“선생님, 환자분은 퇴원하시면 안 됩니다. 되도록...”
간호사가 다급히 나서자 심은지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눈빛으로 간호사를 제지했다.
“저 괜찮아요. 집에 가서 쉬면 돼요.”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간호사는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안쓰럽게 보였다.
옷을 갈아입은 심은지는 곧장 병실을 나섰다. 몇 미터 앞에서 강우빈은 이미 짜증 난 기색으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한서연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강은우를 잠시 간호사에게 맡기듯 떼어놓고 일부러 두 걸음 뒤로 물러서서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간호사에게 물었다.
“간호사 선생님, 제 언니 임신한 거 맞죠?”
순수한 듯한 말투와 웃음이었지만 간호사는 이미 수많은 사람을 겪어온 눈으로 단번에 알아챘다. 이 여자는 조금 전 환자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간호사의 눈빛에는 선명한 경멸이 스쳤고 곧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한서연의 얼굴이 굳어지며 일그러졌다.
...
강씨 가문에 돌아온 심은지는 곧장 위로 올라가 방으로 들어갔다. 아래층에서는 강은우가 한서연에게 저녁 메뉴를 묻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 들어왔다.
심은지의 마음은 싸늘하게 굳어졌다. 정신을 잃고 응급실에 실려 간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린 아들은 그녀를 걱정하는 말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몸이 불편함에도 습관처럼 정시에 눈을 뜬 심은지는 습관처럼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 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매일 반복해 온 일이었다.
비록 떠나기로 결심했지만 남은 십여 일 동안만큼은 끝까지 책임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밥을 지으려던 순간, 거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발걸음이 멈췄다.
강우빈과 강은우가 이미 한서연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다.
강우빈의 시선이 한서연의 손에 난 물집에 닿으며 무심히 말했다.
“이런 잡일까지 할 필요 없어. 심은지가 할 거야.”
심은지의 가슴은 순간적으로 턱 막히는 듯했다. 이어서 들려온 한서연의 나긋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찔렀다.
“괜찮아요. 언니 몸이 안 좋으니 제가 조금이라도 도와드려야죠.”
‘흥!’
강우빈은 심은지가 매일 밥을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듯했다.
그녀는 한서연의 하얀 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 한서연은 그녀 앞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었다. 집안일을 돕느라 의자를 밟고 밥을 했다며 눈물로 토로했었다.
지금은 고작 후라이를 몇 개 하다가 손에 물집이 잡혔다고 강우빈 앞에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람인 척하고 있었다.
심은지는 시선을 돌려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휴대폰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설정한 목표 일까지 아직 12일 남아 있었다.
심은지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천천히 쓸어내리더니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번호를 눌렀다.
“이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