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심은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이준혁의 떨리는 목소리에 심은지는 곧장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야.”
“오, 해가 서쪽에서 떴나 아니면 강우빈이 교통사고라도 당했어?”
몇 년 만에 듣는 익숙한 독설에 심은지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그녀가 기억하는 이준혁이었다.
심은지도 굳이 딱딱하게 굴지 않았다.
“이 변호사님, 요즘 잘나가신다면서요. 맡는 사건마다 승소하신다던데. 그래서 돈 좀 벌어다 드리려고 전화했지.”
이준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곧 그녀의 의도를 눈치챘다.
“장소는 네가 정해.”
...
심은지가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 거실에는 강우빈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별다른 생각 없이 운전해서 강씨 가문을 나섰다.
카페에 도착한 심은지는 입꼬리를 살짝 떨며 맞은편에 앉은 이준혁을 바라봤다. 그는 호시탐탐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이어진 시선에 결국 참지 못한 심은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준혁, 너 모든 고객한테 다 이렇게 해?”
“이건 다르지. 나를 찾아오는 고객 중에 너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거든. 눈 크게 뜨고 잘 봐둬야지. 앞으로는 못 볼 수도 있으니까.”
심은지는 할 말을 잃었다.
이준혁은 여전히 독설가였다. 흥분한 나머지 심은지의 이마를 톡톡 치며 나무라기도 했다.
그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친밀한 장난 같았다.
그러나 심은지는 알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심은지는 빨리 정리하고 싶었다. 그녀는 이준혁에게 위자료 없이 깨끗하게 마무리하는 이혼 합의서와, 강우빈과의 경제적 관계를 정리하는 계약서를 작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위자료 없이?”
이준혁은 말을 듣자 거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심은지, 너 보살이야? 남편이 바람을 피웠는데 위자료도 안 받겠다고? 성모 마리아라도 되는 거야?”
심은지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더 이상 강우빈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강우빈의 재산 따위는 탐나지도 갖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안 받겠다는 건 아니야. 이 자료도 한번 봐줘.”
심은지는 강우빈 회사에서 자신이 받아온 주식 배당금 내역을 대략 설명했다.
그녀는 그의 재산을 나눌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회사의 매년 배당금만큼은 받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 그녀가 직접 시장을 뛰어다니며 프로젝트를 따왔고 회사가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절반 이상 그녀의 공이었다.
“은지야, 너는 너무 마음이 약해서 문제야. 나라면 그 사람 자산 절반은 가져오고 방법을 써서 회사까지 무너뜨릴 거야!”
이준혁은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심은지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는 빨리 이혼하고 싶을 뿐이야.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아.”
“알았어. 맡겨 줘. 은지야, 지난 몇 년 동안 네가...”
이준혁은 말끝을 흐리다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됐어. 돌아온 걸 환영해!”
그녀는 진작에 ‘돌아왔어야’ 했다.
...
이준혁과 헤어진 뒤, 심은지는 다시 별장으로 돌아왔다.
며칠 전 면접을 보기로 했던 아주머니가 이미 와 있었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이건 제 이력서입니다.”
아주머니의 이름은 주혜린이었다. 심은지는 이미 그녀의 이력서를 꼼꼼히 확인해 둔 상태였다.
“아주머니, 이력서는 미리 다 봤어요.”
심은지는 준비해 둔 A4 용지를 내밀었다. 그 용지에는 강우빈 부자의 식습관과 생활 습관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주혜린은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심은지는 별장의 안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별장의 주인을 섬기는 집사 같았다.
심은지는 강우빈 부자의 생활 습관을, 치약 브랜드부터 양말 길이까지 샅샅이 알고 있었다.
“이건 요리법이에요. 아주머니께서 점심에 몇 가지 음식을 해주시면 맛을 보겠습니다.”
주혜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사모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심은지는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복잡한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점심때까지 기다렸지만 강우빈에게서 도착한 건 무심한 한 줄 메시지뿐이었다.
[저녁은 안 먹고 들어갈 테니까 기다리지 마.]
심은지는 그 메시지를 보고도 답장하지 않았다.
오전에 커피를 마셔서인지 점심에는 입맛조차 없어 몇 입만 겨우 넘겼다.
임신 이후 몰려오는 피로감에 낮잠을 청하다가 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집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심은지, 너 하루 종일 도대체 뭘 하는 거야? 휴대폰은 왜 꺼놨어?”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건 강우빈의 날 선 질책이었다.
심은지는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으며 속으로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언제부터일까? 언제부터 강우빈이 이렇게 쉽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을까?’
“휴대폰 배터리가 다 돼서 꺼졌어.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있냐고?”
강우빈은 어이없다는 듯 냉소를 흘렸다.
“심은지, 넌 어떻게 엄마라는 사람이! 은우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넌 도대체 어디 있었어? 빨리 와!”
“뭐라고? 은우가...”
“뚜, 뚜!”
이미 통화는 끊겨 있었다. 심은지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
병원, 병실.
강은우는 심은지에게 등을 돌린 채 누워 있었다. 무릎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지만 심은지는 그가 얼마나 다쳤는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간호사의 설명에 따르면 강은우는 유치원에서 놀다가 넘어져 다리를 다쳤다고 했다.
“은우야, 많이 아파?”
심은지가 조심스레 다가가자 강은우는 곧바로 다른 쪽으로 몸을 돌려 버렸다.
그가 움직이다가 상처에 더 무리가 갈까 봐 심은지는 더 묻지도 못했다.
병실은 곧 깊은 침묵에 잠겼다. 심은지는 속으로 수없이 자문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은우는 나를 이렇게까지 미워하는 걸까?’
잠시 후,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강우빈이 싸늘한 기운을 풍기며 들어왔다.
“심은지, 어떻게 엄마라는 사람이 은우가 다쳐서 입원까지 하는 사이에 어디서 뭘 했던 거야?”
심은지는 미간을 좁혔다. 하루 종일 아이의 곁에 붙어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몸이 안 좋아서 잠들었어.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된 줄도 몰랐고.”
그녀는 강은우의 다친 다리를 보며 애써 해명했다.
전화를 받지 못한 것은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강우빈은 냉혹하게 쏘아붙였다.
“흥, 몸이 안 좋아서 잠들었다고? 심은지, 언제부터 그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
“무슨 뜻이야?”
심은지가 되묻자 강우빈은 비웃듯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봤다.
그의 얼굴은 음산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심은지의 뺨은 억울함에 붉어졌다.
그는 어제 그녀가 알레르기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사실조차 잊은 걸까?
“잠들었다고?”
강우빈은 냉소를 터뜨리며 갑자기 사진 뭉치를 그녀 발치에 내던졌다.
“몸이 안 좋아서 잠든 게 아니라 다른 남자와 있었던 거 아니야? 아들이 다쳐서 병원에 왔을 땐 연락 두절이더니 다른 남자와 희희낙락할 땐 휴대폰 배터리가 멀쩡했더군.”
심은지는 멍하니 사진들을 내려다봤다.
바닥에 흩어진 사진 속에는 그녀와 이준혁이 함께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둘이 마주 보며 웃는 장면, 이준혁이 그녀의 이마를 톡톡 치며 웃는 장면, 심지어 이준혁이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장면까지 모두 담겨 있었다.
각도가 기묘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찍어낸 사진이라는 건 명백했다.
“설명해!”
강우빈의 목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심은지,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됐다면서 이건 뭐가? 은우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는데도 연락은 안 되고 다른 남자와 데이트할 땐 연락이 잘 되더라?”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온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 이 남자와 무슨 사이야? 며칠 동안 네가 그렇게 굴었던 것도 다 이 사람 때문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