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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심수혁과 그의 비서 주소민이 여행 둘째 날을 맞이하던 그 시각 나는 마지막 업무 인수인계를 끝내고 인사팀에 들러 퇴직 절차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사직서를 제출한 지 10분도 채 안 되어 휴대폰에 알림이 하나 떴다. [대표님이 퇴직 신청을 승인하셨습니다.] “봐봐, 심 대표님도 원래 저 여자 내보내고 싶었던 거 아냐? 눈치는 있네.” “그러니까요. 회사에 남아봤자 대표님 기분만 상하니 그만두길 잘했죠. 그런데 앞으로 뭘 하려나 몰라요.” “우리같이 월급 2, 3백만 원 받는 사람들이 걱정할 일은 아니지. 그래도 저 사람은 심 대표님 와이프잖아. 그냥 집에 처박혀 있어도 돈을 받을 수 있을걸?” 짐을 싸는 내내 동료들의 비아냥과 비웃음이 귓가에 맴돌았지만 이제는 익숙하다. 회사 사람들은 내가 주소민과 사이가 안 좋은 걸 다 알고 있었다. 심수혁은 내 남편이면서도 늘 주소민의 편을 들었고 나한테는 대놓고 망신 주기 일쑤였다. 그러니 이 사람들도 나를 대놓고 무시하며 그녀에게 잘 보이려 혈안이었던 것이다. 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참고로 나 이번에 그냥 쉬는 거 아니고요. 연봉 두 배에 복지 더 좋은 회사 제안받아서 옮기는 거예요.” 나는 말을 끝내고 동료들의 눈빛이 질투로 물든 얼굴은 외면한 채 정리한 짐을 들고 조용히 회사를 나섰다. 그런데 건물을 나오자마자 심수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회사를 그만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황당한 말을 들었다. “방금 너한테 문서 하나 보냈어. 한 시간 안에 마무리해서 다시 나한테 보내.” ‘아, 이 사람 아직 내가 퇴사한 거 모르는구나?’ 나는 피식 웃으며 문서를 열었고 내용을 확인한 순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얼마 전에 내가 주소민한테 ‘양보했던’ 그 프로젝트였다. 여전히 똑같았다. 일은 내가 하고 성과는 주소민이 가로채 가고 사고가 터지면 책임도 내 몫이었다. 처음엔 나도 거절했었지만 그럴 때마다 심수혁은 온갖 말로 나를 설득하려 했고 내가 끝까지 거절하면 냉전이 시작됐고 며칠 동안 말 한마디 없이 나를 무시했다. 결혼 전부터 부모님은 늘 부부는 한쪽이 먼저 져줘야 산다고 말했다. 그 말이 떠올라 매번 내가 먼저 물러섰다. 그렇게 참고 또 참으면서 버텼다. 언젠간 이 사람이 나의 진심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주소민의 승진을 위해 심수혁은 나와 크게 싸우고 석 달 동안 대화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고열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는 날조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나를 밀어붙이며 한 달 내내 밤새워 얻은 프로젝트를 주소민에게 넘기라고 했다. 그날 정말 모든 게 끝났다. “나 회사에서 나왔어.”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회사에 없어?” 그의 목소리는 금세 차가워졌다. “지금 업무 시간인 거 몰라? 서희연, 너 지금 무단이탈이야. 사규대로면 하루치 월급 삭감이야.” “알아. 그런데 나 이제...” 내가 퇴사했다고 말하려는 찰나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주소민의 애교 섞인 목소리였다. “수혁 오빠, 희연 씨가 싫다는데 억지로 시키지 마요. 제가 할게요.” “안 돼. 너 어제 밤새 일했잖아. 오늘은 꼭 쉬어야 해.” 조금 전 나에게 쏘아붙이던 것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 “저 진짜 괜찮은데요?” 주소민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회사 대표인데 내가 쉬라고 했으면 쉬어야지. 내 말 안 들을래?” 그러자 주소민은 혀를 쏙 내밀며 웃었다. “전 그냥... 희연 씨가 힘들까 봐 걱정돼서요.” “희연이? 걔가 뭐가 힘들어. 회사에서 하는 일도 없잖아. 게다가 회사 지분도 있는 사람이 이 정도 일도 안 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심수혁은 코웃음을 쳤고 그 한 마디가 내가 그동안 해온 모든 일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분노도 실망도 느끼지 않았고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이 겪어서 그랬다. 내가 말이 없자 심수혁은 내가 그의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소 부드럽게 말했다. “희연아, 내가 너한테 일만 시키는 줄 알아? 이건 훈련이야. 너는 내 아내니까 회사에 대해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하잖아.” “너도 소민이 좀 본받아. 어제 새벽 네 시까지 일하더라. 이렇게 성실한 애를 처음 봤어.” 그러자 옆에서 주소민이 얄밉게 거들었다. “전 희연 씨도 충분히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 얄미운 뉘앙스를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말했다. “희연이가 너 반만큼만 닮았으면 얼마나 좋겠니. 올해 프로젝트도 다 네 손에서 나온 거잖아.” 둘이 아주 죽이 척척 맞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봤자 소용없으니까. 올해 프로젝트들은 전부 내가 처음부터 기획한 것이었지만 주소민이 중간에 슬쩍 가로챘고 심수혁은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설마 이것 때문에 내가 이혼을 제기하겠냐는 표정으로. “아무튼 이따가 나랑 소민이 약속 있어서 나가야 하니까. 빨리 문서 정리해서 보내.” 그는 내 대답도 안 듣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몇 분 후 내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는데 주소민이 새로 올린 SNS 게시물 알림이었다. 촛불 가득한 레스토랑, 화려한 디너 테이블, 그리고 그녀가 심수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사진. 테이블 위엔 조그마한 선물 상자가 하나 있었는데 딱 봐도 반지가 들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게시물을 아래로 쭉 내렸고 전날 새벽 네 시에 두 사람이 바에서 술 마시는 사진이 또 하나 더 있었다. 심수혁이 말한 ‘노력’은 술자리였고 이따가 있다는 ‘업무 미팅’은 데이트였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났고 이젠 그에게 따지거나 묻고 싶지도 않았다. 물어봤자 그는 변명만 늘어놓을 테고 설령 내가 말을 잃게 만들어도 돌아오는 건 끝없는 냉전뿐이었다. 결국 내가 또 먼저 사과하고 비위를 맞춰야 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시간에 돈이나 더 벌 걸 그랬다. 진심은 배신해도 돈은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회사를 뒤로하고 걸어갔다. 그런데 막 주차장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또다시 휴대폰이 진동해서 보니 심수혁이 또 내 카드로 4천만 원을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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