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정작 소은지는 곁에 앉은 남자의 속내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동안 박현우와 함께했던 순간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제 남자친구는 택배기사예요. 비 오는 날이면 꼭 전화해서 제가 집에 있는지, 안전한지 확인하죠.”
“월급도 한 푼 남기지 않고 다 저한테 줘요. 돈과 사랑은 뗄 수 없는 관계라며, 모든 걸 주고 싶다고 했어요.”
행복이 가득 묻어나는 말투를 듣고 있자니 한태현의 마음속에 어느덧 질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내 저도 모르게 불쑥 끼어들었다.
“여자가 먼저 청혼하게 하는 사람 따위 무슨 자격으로 사랑을 논하지?”
소은지는 말문이 막혔다.
왠지 모르게 눈앞의 남자가 박현우에게 강한 적대감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곧 다가올 프러포즈를 떠올리자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한태현 씨는 참 좋은 분 같아요.”
나지막이 속삭인 한마디는 한 줄기 빛처럼 아무 예고 없이 운전석에 앉은 한태현을 뒤덮은 어둠을 꿰뚫었다.
좋은 사람이라.
과연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단어인가?
한태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네.”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는 오히려 듣는 이를 더욱 서글프게 했다.
“행운이란 건 늘 잘난 사람들한테만 오는 줄 알았어요. 저 같은 빈털터리는 한태현 씨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될 텐데... 그런데도 두 번이나 태워 주셨잖아요. 공통으로 아는 지인이 있다는 걸 감안해도 이미 큰 은혜를 베푼 셈이죠.”
고작 이런 사소한 일을 은혜라고 생각하다니.
핸들을 잡고 있던 한태현의 손이 움찔했다.
이내 곁눈질로 조수석에 앉은 소은지를 훑어보았다.
노을이 차창을 통해 그녀의 옆얼굴을 감쌌고,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석양 아래 세상에서 가장 고운 옥처럼 빛났다.
그의 동공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순간, 오래전의 목소리가 예고 없이 머릿속을 스쳤다.
“엄마, 제가 잘못했어요. 99점 받아서 죄송해요. 다음엔 꼭 100점 받을 테니까 나 좀 내보내 주면 안 돼요? 너무 배고프고 추워요... 엄마!”
어린 시절 감금되었던 기억이 밀려들자 한태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애초에 진흙탕에서 기어 올라온 사람이었다.
평생 씻어낼 수 없는 어둠을 몸에 고스란히 묻힌 채로.
당시 따뜻한 손으로 그의 주변에 스며든 차가운 기운을 몰아낸 장본인은 다름 아닌 소은지였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 유일한 빛이었던 여자를 자신이 경험했던 어둠과 심연 속에 영원히 가두고 싶어 하다니.
짜증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젠장, 나 무슨 생각했던 거야!’
이성이 마음속에 자리한 맹수를 간신히 억눌렀다.
소은지는 곁에 앉은 남자의 복잡한 머릿속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곧이어 차가 고가도로를 내려와 유턴했다.
비록 의아하긴 했으나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속으로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현우 씨, 내 청혼받아줄 거죠?”
그녀의 눈엔 기대로 가득했다.
잠시 후, 차는 인천 더스퀘어 근처에 멈추었다.
조수석에서 내린 소은지는 한태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태워 줘서 고마워요.”
한태현은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다만 핸들을 잡은 손은 어느새 힘줄이 불끈 튀어나와 있었다.
“행복하길 바랄게요...”
목소리는 갈기갈기 찢어졌고, 심장은 거대한 힘에 짓눌린 듯 뒤틀렸다.
그 안에서 한 마리 맹수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어서 가!’
더 늦으면 자신이 참지 못할 것이다.
그녀를 보낸 걸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니...
한태현의 말을 듣자 소은지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뒤돌아서 정성껏 꾸며진 광장으로 한 걸음씩 걸어갔다.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태현은 이를 꽉 깨물었다.
입안에 금세 피비린내가 번졌다.
“은지야...”
한태현의 동공이 붉게 물들었고, 당장이라도 쫓아가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머릿속으로는 단 한 마디만 되뇌었다.
‘은지를 행복하게 해줘야 해. 그거면 돼...’
...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기울고,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소은지는 꽃다발을 품에 안고 광장 한복판에 서서 자신만의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덧 양 볼은 발그레 달아올랐다.
주변에는 구경꾼이 점점 많이 모여들었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 사람, 실시간 방송을 켜는 인플루언서, 심지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언론 기자들도 있었다.
박현우는 8시 5분이 되어서야 유유히 나타났다.
난생처음 보는 고급스러운 정장 셔츠를 입고, 손목에는 낯선 롤렉스 시계를 차고 있었다.
이내 여유롭고 당당한 걸음으로 소은지를 향해 다가왔다.
“뭐야?”
냉정한 말투는 여느 때보다도 차가웠다.
하지만 프러포즈를 앞둔 소은지는 설렘에 마음이 들떠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양손으로 한가운데 결혼반지를 꽂아 넣는 꽃다발을 꼭 안고 부끄러운 듯 말했다.
“오늘 현우 씨를 부른 이유는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예요. 집도, 차도 없지만 돈이 많든 적든 떠나서 평생 현우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
“사랑해요, 현우 씨! 저랑 결혼해 줄래요?”
진심이 담긴 풋풋한 목소리는 미래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묻어났다.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환호성을 터뜨렸다.
“정말 용기 있는 여자네! 얼른 받아주지 않고 뭐 해요?”
“대답해! 대답해!”
멀지 않은 나무 그늘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어둠 속 남자는 10년 동안 짝사랑해 온 여자가 다른 사람에게 프러포즈하는 장면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사랑하지만 이어질 수 없는 고통에 눈동자는 서서히 식어갔고, 오로지 차가움과 외로움만이 남았다.
이때, 금테 안경을 쓴 점잖은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그를 불렀다.
“대표님.”
다름 아닌 정민기였다.
“진정한 사랑은 소유가 아닌 배려임을 드디어 이해하셨군요. 이 결정을 내리신 건 그동안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돌파구입니다. 곧 완전히 극복하고 완치까지 갈 수 있을 거예요.”
“꺼져.”
한태현은 날뛰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정민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한태현의 병세가 얼마나 심각한지, 소은지를 향한 집착과 소유욕이 얼마나 강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할 때는 전기충격 치료로 겨우 억제할 정도였다.
한태현은 지금 일반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자제력으로, 자신이 가장 바랐던 행복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배려하고 있었다.
광장 곳곳이 열기로 들끓는 동안, 한태현은 쓸쓸하게 등을 돌렸다.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는 모습만큼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결국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길가에 세워진 검은 차로 향했다.
잠시 후, 엔진 소리와 함께 쏜살같이 자리를 떠났다.
정민기는 떠나기 전, 광장 한가운데 벌어진 프러포즈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내 택시를 잡아 한태현이 떠난 방향을 따라갔다.
한편, 광장 중심.
사람들의 함성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프러포즈를 받은 주인공이 어떤 대답을 할지 주목했다.
승낙할까? 아니면 거절할까?
소은지의 심장이 점점 조여왔다.
꽃다발을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뜨거운 조명, 그리고 모든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박현우는 무덤덤한 눈빛으로 꽃다발 한가운데 꽂힌 반지 케이스를 내려다보았다.
이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느긋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