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임길태가 놀라 소리를 지르면서 재빨리 권예진을 부축했다.
“도련님, 권예진 씨 쓰러졌어요.”
그러자 공호열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쓰러지면 119를 불러요. 내가 의사도 아닌데 날 불러서 뭐 해요?”
당황한 임길태는 잠깐 생각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도련님, 어르신께서 2년 동안 발작이 없으셨다가 어제 갑자기 발작하신 게 아무래도 석연치 않아요. 게다가 어르신은 꾸준하게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예진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치료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됩니다. 혹시 예진 씨가 딴 속셈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면 차라리 오아시스에 머물게 하면서 감시하시는 게 어떨까요? 정말로 딴 속셈이 있다면 언젠가 드러날 테고 아무 문제 없다면 한집에서 지내면서 정도 쌓고 좋잖아요.”
공호열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집사님, 많이 한가하신가 봐요?”
“아닙니다.”
임길태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공한무는 혼담이 오가는 날에 갑자기 발작했고 권예진은 때마침 은침을 들고 나타나 혼인을 강요했다. 모든 게 짜놓은 것처럼 딱 들어맞았다.
공호열이 잠깐 생각하다가 싸늘하게 말했다.
“지석이 불러요.”
박지석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가운을 입은 채 서둘러 오아시스로 달려왔다. 오는 길에 신호를 두 번이나 위반했다.
소파에 쓰러져있는 여자를 본 그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약혼하더니 달라졌네. 하지만 몸이 너무 말라서 당분간은 자제 좀 하는 게 좋겠어.”
그는 공호열이 결혼을 강요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농담을 던지면서 구급상자를 들고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근데 약은 네가 직접 발라줘.”
“닥쳐.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공호열은 그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버렸고 차가운 두 눈에 분노가 가득했다.
“응?”
박지석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쳐다보자 공호열이 짜증 섞인 얼굴로 말했다.
“빨리 좀 봐. 갑자기 쓰러졌어.”
박지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갑자기 쓰러진 거 맞아? 네가 못살게 굴어서...”
지금까지 오아시스에 온 여자는 김다윤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공호열과 함께 자란 그는 김다윤에 대한 그의 감정을 잘 알고 있었다.
어제는 김다윤의 스무 번째 생일이자 약혼 날이기도 했다. 약혼하고도 수도승처럼 지내는 건 너무 순진하거나 문제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공호열의 휴대폰이 또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의 두 눈에 짜증이 스쳤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봐.”
박지석은 그제야 소파에 누워 있는 여자를 보았다. 놀랍게도 김다윤이 아니었다.
몸매가 가냘팠지만 섬세한 이목구비와 도자기처럼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는 김다윤을 압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는 의미심장하게 공호열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걸 보고는 더는 묻지 못하고 서둘러 진찰했다.
“걱정하지 마. 영양실조로 인한 저혈당이야. 당분을 좀 보충하면 금방 깨어날 거야.”
박지석은 링거를 꽂은 다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호열아, 누군지 소개 안 해줘?”
“중요한 사람 아니니까 알 필요 없어.”
할아버지 병을 고쳐준다고 해도 평생 독수공방 신세인 공씨 가문 안주인일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사람을 오아시스에 데려왔다고?”
박지석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야 좀 남자답네. 지금이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김다윤이 널 살려준 건 사실이지만 돈 좀 쥐여주고 끝내도 되잖아. 은혜를 갚는다고 몸으로 때우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공호열은 박지석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내가 결혼할 여자는 다윤이뿐이야. 근데 아직도 안 가?”
순간 움찔한 박지석은 멋쩍게 코를 긁적이고는 구급상자를 들고 오아시스를 나섰다.
오아시스를 벗어나자마자 박지석은 휴대폰을 꺼내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오아시스에서 뭘 봤는지 상상도 못 할걸? 애들 불러. 유포리아에서 만나자.”
그 시각 공호열은 임길태에게 권예진을 잘 지켜보라는 말만 남기고 오아시스를 떠났다.
...
링거를 거의 다 맞을 무렵 권예진도 의식을 되찾고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정신이 몽롱하여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침대 머리맡의 스탠드가 따뜻한 빛을 쏟아냈고 블랙과 화이트, 그리고 그레이 톤의 방과 짙은 남색 이불 모두 낯설기만 했다.
‘여긴 어디지? 설마... 오아시스?’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녀는 이렇게 오아시스에 머물게 되었다.
‘저혈당 때문에 쓰러지다니 몸이 아주 엉망이야. 그나저나 공호열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라고 생각하겠지.’
“너에게 들려주고 싶어. 지금처럼 젊고 예쁠 때...”
그때 권예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정가영의 전화인 걸 보고는 서둘러 받았다.
“가영아,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
“있잖아. 나 김다윤이랑 성한빈을 봤어.”
휴대폰 너머로 정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주변이 매우 시끄러웠다. 권예진은 서둘러 일어나 링거 바늘을 뽑고 물었다.
“지금 어디야?”
“일하는 데. 유포리아.”
정가영은 그녀와 같은 고향 출신이었는데 학업 성적이 좋지 않아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
지금은 유포리아에서 술을 팔았다. 기본 월급은 없지만 판매 인센티브와 팁으로 월 수백만 원은 쉽게 벌었다.
권예진은 택시를 타고 곧장 유포리아로 향했다.
유포리아는 해경시 최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회원제로 운영되며 보안이 철저해서 재벌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권예진은 정가영을 따라 직원 통로를 통해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반드시 김다윤의 약점을 잡아 실체를 폭로해야 했다.
권예진은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먼저 클럽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브라운 웨이브 가발을 쓴 후 짙은 화장을 하고 나서야 정가영과 함께 806호 룸으로 향했다.
문을 살짝 열자 야릇한 소리가 들려왔다.
“못 말려, 정말. 내가 당분간 연락하지 말라고 했잖아.”
김다윤이 앙탈을 부렸다.
“들키면 우리 계획이 다 물거품이 된단 말이야.”
“자기야, 뭘 그렇게 걱정해.”
남자가 말했다.
“공호열은 재미도 없는 놈이잖아. 내가 제대로 즐겁게 해줄게.”
공호열은 지난 2년 동안 김다윤을 건드리진 않았지만 돈은 아낌없이 줬다.
성한빈이 말했다.
“공호열이 아무리 권력을 쥐고 돈이 많으면 뭐 해. 그래봤자 쓸모없는 놈인데.”
공호열의 돈을 쓰면서 공호열의 여자를 탐하는 기분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권예진은 김다윤과 성한빈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목격하니 그래도 충격이었다.
‘벌써 저렇게 가까워졌어? 뻔뻔한 것들.’
이것이 그녀가 공호열에게 파혼하고 그녀와 결혼하자고 강요한 또 다른 이유였다.
권예진은 야간 촬영 모드를 켜고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막 동영상을 촬영하려는데 뒤에서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화들짝 놀란 김다윤이 성한빈을 밀쳤다.
“누가 왔어.”
“여긴 유포리아야. 누가 우릴 방해한다고 그래.”
한창 즐기던 성한빈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모자란 놈.”
김다윤은 성한빈을 걷어차고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고 뛰쳐나갔다. 권예진이 변장을 했는데도 김다윤은 단번에 알아봤다.
그녀가 들고 있는 휴대폰을 본 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권예진, 거기 서. 네가 왜 여기 있어?”
권예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김다윤이 성한빈에게 소리쳤다.
“빨리 쟤 휴대폰 뺏어.”
몸싸움이 벌어지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쏠렸다.
바로 그때 808호 룸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모습이 나타났다.
‘공호열? 공호열이 왜 여기에 있어?’
김다윤도 공호열을 봤다.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권예진,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김다윤은 울먹거리면서 공호열에게 달려가 안겼다.
“호열 씨, 나 좀 살려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