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권예진의 침묵은 공호열의 눈엔 곧 동의처럼 보였다.
그 순간, 그의 가슴속에서 거대한 분노가 폭풍처럼 치밀어 올랐다.
박지석은 두 사람 사이의 날카로운 기류를 느끼고는 서둘러 말을 꺼냈다. 이대로 두면 오해는 더욱 깊어질 뿐이었으니까.
“그래도 사람 목숨을 구한 건 맞잖아. 누구라도 걱정되고 자책하는 건 당연하지.”
공호열이 고개를 돌렸고 싸늘한 눈빛으로 박지석을 쏘아봤다.
“그래서 네 말은 내가 괜히 난리 피운다는 거냐?”
박지석은 어깨를 으쓱하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신선이 싸우면 그 밑에선 졸개가 죽게 된다. 그는 괜히 불똥 맞기 싫어 시선을 돌려 권예진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요즘은 식물인간에서 깨어나는 경우도 점점 늘고 있어요. 가족들이 자주 말을 걸고 특히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는 게 뇌를 자극하는 데 도움이 되죠. 의식 회복에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고 해요.”
“...네.”
권예진은 박지석을 바라보았는데 텅 비어있던 눈동자에 작은 희망의 불꽃이 반짝였다.
“이제 곧 우현이를 박 선생님 병원으로 옮기나요? 그럼 저도 시간 날 때마다 자주 찾아가서 예전 얘기 많이 해줄게요.”
공호열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표정은 어둡고 무거웠지만 더는 권예진을 자극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고 밤공기에는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해경시로 돌아오는 길에서 권예진은 여전히 병실에 남아 정우현의 곁을 지켰다.
한편, 공호열의 벤틀리 안.
박지석은 운전석 옆 조수석에 기대 앉아 금테 안경을 벗고 피곤한 듯 콧대를 꾹 눌렀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는 공호열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 사고 말이야.”
박지석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설마 네가 벌인 일은 아니지?”
공호열이 코웃음을 쳤다.
“헛소리 마.”
그의 음성엔 분명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
“내가 누굴 죽이고 싶으면 그딴 싸구려 방식은 쓰지도 않아.”
하지만 박지석은 물러서지 않았다.
“사람들은 흔히 연애에 빠진 여자는 이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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