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여기 살아요?
‘...곽지환?’
엘리베이터 앞에서 침착하게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하필 곽지환일 줄은 심가희는 상상조차 못 했다.
‘그래서 내 이름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불렀던 거구나...’
하지만 그가 어떻게 자신이 엘리베이터에 갇힌 걸 알았는지, 심가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곽지환 씨, 정말 감사해요.”
“아니에요. 별일도 아닌데요.”
관리실 직원들도 곽지환에게 고마움을 전했고 심가희에게 다친 곳은 없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심가희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놀라긴 했지만 다행히 몸은 멀쩡했다.
관리 직원들이 자리를 뜨자 그녀는 곽지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고마워요, 오빠. 또 한 번... 날 구했네요.”
심가희는 말끝을 흐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상하리만치 위험한 순간마다 곽지환이 나타났다.
더는 엮이고 싶지 않다고 다짐해도 이상하게 자꾸 이렇게 그의 도움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땐, 괜스레 마음이 놓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곽지환은 은색 안경 너머 깊고 묵직한 눈빛으로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벽에 세워둔 우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밀당 같은 거, 너무 자주 하면 남자들이 싫어해.”
“...네?”
심가희는 얼떨떨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곽지환은 우산에 묻은 물기를 툭툭 털며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그냥 다시 이사 가. 적어도 또 엘리베이터에 갇히진 않을 거잖아.”
그의 말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심가희의 고마운 마음은 순식간에 분노로 바뀌었다.
“지금... 제가 도현 씨 관심 끌려고 일부러 엘리베이터에 갇힌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닌가?”
곽지환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진심으로 헤어질 생각은 있어?”
심가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헤어지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리 쉽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게다가 8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쉽게 끊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빠가 또 날 도와준 건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도현 씨와 관련된 일은 제 문제니까,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으면 해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하고는 곽지환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자리를 떴다.
엘리베이터는 수리됐지만 심가희는 마음이 편치 않아 계단을 선택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 때문인지 그녀의 발걸음은 잰걸음이었고 8층쯤 올랐을 때는 이미 숨이 턱까지 차올라 결국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심가희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자 곽지환이 조용히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뭐야, 잔소리도 모자라서 따라오기까지 하네?’
심가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또 따라와요? 집까지 쫓아와서 잔소리 더 하시려고요?”
곽지환은 7층과 8층 사이 복도에 올라와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집에 가는 길인데.”
그리고 덧붙였다.
“호흡이 가빠지기 전에 꾸준한 속도로 올라가야 덜 힘들고 산소 부족도 안 느껴져.”
심가희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섰다.
“...여기 살아요?”
곽지환은 그녀를 지나쳐 올라가며 무심하게 답했다.
“안 되냐.”
입을 꾹 다문 심가희는 이번엔 그의 말대로 속도를 늦췄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계단 몇 개 정도의 거리만 유지됐다.
곽지환이 계속 걸음을 멈추지 않자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대체 몇 층까지 올라가려는 거야?’
그렇게 궁금해하던 찰나, 두 사람은 동시에 16층에서 발을 멈췄다.
곽지환은 그녀의 맞은편 집 앞에 도착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었다.
“맞은편에 사세요?”
심가희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같은 아파트, 같은 동, 같은 층에다 맞은편 집이라니.
며칠째 이사 와서 그의 얼굴은커녕 소리조차 들은 적 없어서 사람이 없는 줄만 알았었다.
“어제 이사 왔어.”
곽지환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더 궁금한 거 있어?”
심가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어디에 사는지는 그의 사생활이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곽지환의 태도를 보니, 그도 맞은편에 그녀가 사는 사실은 모르는 듯했다.
그날 밤 일이 있은 후로는 집착 같은 건 애초에 불가능할 것 같았다.
“없어요.”
짧게 답한 그녀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곽지환은 그녀가 집에 들어가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는 곧바로 여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금 왜 말하다가 갑자기 끊었어?”
수화기 너머에서 여진성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곽지환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배터리 없어서 꺼졌어.”
사실 방금 전 여진성과 통화 중에 근처를 지나가던 관리 직원이 8동 1라인 16층에 사는 심가희가 엘리베이터에 갇혔다는 말을 하는 걸 듣고 바로 전화를 끊고 달려간 것이었다.
엘리베이터가 5층에 멈춰 있는 것을 확인한 뒤, 그는 세 계단씩 뛰어 급히 올라갔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를 마친 심가희는 문을 열려다 문득 멈췄다.
혹시 몰라 도어뷰로 복도를 살펴보니, 복도는 조용했고 맞은편 문도 단단히 닫혀 있었다.
그제야 안심하며 서둘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앞으로 마주칠 일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같은 층에 맞은편이라니... 이제 마주치는 게 일상이겠네.’
한숨을 내쉬며 회사에 도착한 그녀는 회의 자료를 정리하다가 문득 뭔가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리 씨, 어제 회의록 중에 곽 대표님 것만 출력이 안 된 것 같은데요?”
사유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제 곽 대표님이 온라인 회의를 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