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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침대까지 넘보는 남자

“...몰랐어요?” 심가희는 어젯밤 곽도현이 분명히 온라인 회의가 있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곽 대표님한테 그런 일정 없었어요. 저도 별다른 지시 못 받았고요.” 사유리는 곽도현의 수석 비서로 그의 모든 업무 일정을 전담하고 있다. 하지만 어디에도 회의 기록은 없었고 어떤 지시도 내려온 적이 없었다. 심가희의 마음속에 조용히 의심이 피어올랐다. ‘혹시 도현 씨가 거짓말을 한 걸까?’ 하지만 곧 어젯밤 비에 흠뻑 젖어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감기라도 걸려 몸이 안 좋아서 회의를 미뤘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스쳤다. “아... 내가 착각했나 봐요. 분명 온라인 회의 있다고 기억했는데.” 점심 무렵, 곽도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저녁 같이 먹자. 어머니 치료 얘기하자.] 심가희는 망설임 없이 답장을 보냈다. [알겠어요.] 어머니 치료에 관한 일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퇴근을 앞두고 바쁘게 짐을 챙기던 중, 곽도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갑작스럽게 접대 일정이 생겼다는 말이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이 멈칫했다. “괜찮아요. 일이 먼저죠. 끝나고 얼른 들어가서 푹 쉬세요. 엄마 얘기는 나중에 해요.” 전화를 끊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괜스레 허전했다. 스무 해가 넘도록 누워 계신 어머니에게 이제서야 겨우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참이었다. 하루라도 더 빨리 치료를 시작해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좋은 일은 기다림 끝에 오기 마련이라고 심가희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곽성그룹 빌딩을 막 나서려던 순간,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놀랐지? 감동이지?” 강지윤이 차에 기대어 손을 흔들었다. “출장 중 아니었어?” 심가희는 놀라서 그녀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차에 올라타자 강지윤이 웃으며 운전대를 잡았다. “큰 프로젝트는 끝났어. 나머지는 애들한테 맡기고 바로 왔지. 네 얼굴 빨리 보고 싶어서.” 강지윤은 대학 시절 룸메이트이자 절친이지만 전공은 달랐다. 번역을 전공한 그녀는 졸업 후 번역 스튜디오를 차려 꽤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나 진짜 괜찮아. 이렇게까지 안 와도 되는데.” 심가희는 그녀가 괜히 걱정돼 일을 제쳐 두고 달려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레스토랑 앞에 차를 세우고 두 사람은 함께 내렸다. “너무해. 나도 미리 좀 쉴 수 있잖아.”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자리를 잡았다. 강지윤은 잠시 투정을 부리다 금세 표정을 고쳐 앉았다. “그래서... 곽 대표님이랑 무슨 일이야?” 진지해진 강지윤의 질문에 심가희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차분히 이야기했다. “헐, 곽도현이랑 최유진? 피 한 방울 안 섞였어도 삼촌 조카 사이로 알고 있던 사이잖아, 십 년 넘게.” 강지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탁 쳤다. “너랑 8년이나 만났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무리 봐도 최유진이 문제야. 걔 진짜 착한 척하는 거 너무 역겨워.” “그리고 곽도현은 왜 그런 애한테 넘어간 거야? 남자들은 결국 다 똑같아. 자기 앞에 있는 걸 두고도 남의 걸 탐내더라고.” 심가희는 씁쓸하게 웃었다. “근데 너... 정말 그 집에 다시 들어갈 거야? 용서할 거야?” 강지윤은 다시 물었다. “성씨를 바꾸지 않는 이상 나만 생각하며 살 순 없잖아. 무엇보다 도현 씨가 엄마 치료 위해 병원까지 알아봐 줬는데... 한 번은 용서해 보려고.” 심가희는 유리컵 가장자리를 문지르며 난처하게 말했다. “어쩌면 이번엔 진짜 잘못을 뉘우쳤을 수도 있잖아.” 강지윤은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은 듯 투덜거리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근데 말야, 생각해보면 너도 복수한 거 아니야? 그날 밤 일 말이야. 뭐 어쨌든 본전은 건진 셈이지.” 강지윤의 농담에 심가희는 웃음을 참으며 겨우 말을 삼켰다. 하지만 그날 밤을 떠올리면 본전은커녕 후회만 가득했다. 그때, 강지윤이 심가희 등 뒤를 바라보며 표정이 살짝 굳었다. 심가희가 돌아보자 곽지환과 여진성이 식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또 마주쳤네...’ 심가희는 얼른 시선을 돌리며 모른 척했다. “설마 나 따라와서 여기까지 온 거야?” 여진성이 의미심장하게 강지윤을 쳐다봤다. “잘난 척하지 마. 너 따라다닐 시간에 자료나 번역했겠어.” 강지윤이 단호하게 받아쳤다. 심가희는 알고 있었다. 강지윤에게는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남자가 강지윤이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사람이란 것도. 하지만 그 남자는 아직도 그 마음을 모르는 눈치였고 강지윤 역시 굳이 남에게 소개하거나 떠벌릴 생각은 없었다. “강지윤, 네가 나 스토킹한 게 하루 이틀이냐? 그렇게 싫으면 쿨하게 파혼해.” 여진성이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강지윤은 포크를 꽉 움켜쥐다가 순식간에 손을 들어 식탁 위에 있던 나이프를 그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안 보여? 나 지금 친구랑 밥 먹는 중이거든?” 여진성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설마 여기서 살인이라도 하게?” 여진성은 그녀의 손을 슬쩍 밀쳐내며 심가희를 흘끗 바라봤다. “친구?” 심가희는 그 순간,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렸다는 걸 느꼈다. 도망칠 수도 없었고 결국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지윤이 대학 동기이자 절친, 심가희입니다.” 심가희는 일부러 곽지환을 외면하며 말했다. 그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뒤에야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혹시... 곽도현 대표님 여자친구? 아니구나, 약혼녀 맞죠? 다음 달 결혼이라던데.” 여진성은 심가희를 힐끔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심가희가 대답할 틈도 없이 그는 곽지환을 향해 말을 돌렸다. “네 사촌동생 예비신부잖아. 맞지?” 곽지환은 그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낮게 말했다. “네가 나보다 더 잘 아네.” 여진성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미인은 원래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지.” 강지윤은 코웃음을 치며 곽지환을 향해 쏘아붙였다. “곽도현 대표님한테 꼭 전하세요. 우리 가희, 그렇게 만만한 여자 아니라고. 세상에 남자 많아요. 그 사람 하나 없어도 아무 문제 없거든요. 우리 가희 인기 많은 거, 혹시 모르셨나? 최근엔 침대까지 넘보려던 남자도 있었어요. 근데 우리 가희, 끝까지 선은 지켰죠.” “지윤아!” 심가희는 다급히 그녀를 말리고 싶었지만 테이블 너머라 손이 닿지 않았다.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제발 그만 좀 해...’ 그 순간, 곽지환의 시선이 천천히 심가희를 향해 옮겨졌다. 그리고 어딘가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침대까지... 넘보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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