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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20만 원으로 먹튀 해?

풍덩. 물에 빠진 순간, 비명이 들리면서 몸이 점차 아래로 가라앉았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코와 목에 물이 들어찼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그녀는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위로 올라가려 애썼다. 이때, 낯익은 그림자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심가희는 손을 뻗었지만 곽도현은 안중에도 없는 듯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헤엄쳐 나갔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자 8년간 사랑했던 남자는 두 여자가 동시에 물에 빠졌을 때 최유진을 구해주었다. 마치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발버둥치는 것도 잊은 채 익숙한 모습이 다른 여자를 안고 헤엄쳐 올라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이때,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은 느낌이 들면서 몸이 위로 붕 떠 올랐다. 심가희는 무의식중으로 고개를 돌렸다. 깊고 그윽한 눈동자, 문득 그날 밤 마주했던 시선이 떠올랐다. 그 남자였다! 심지어 물속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가 다시 목으로 물이 흘러들었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연신 기침했고, 도우미가 수건을 들고 와서 물기를 닦아주었다. 그 남자가 왜 여기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감사 인사는 해야 했다. 이내 고개를 들었으나 자취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시선을 돌리자 불쌍한 표정으로 곽도현을 꼭 끌어안은 최유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곽도현이 최유진을 밀어내고 빠르게 다가와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그제야 약혼녀의 존재가 떠오른 건가? 심가희는 싸늘하게 웃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곽명철이 소식을 전해 듣고 부랴부랴 달려와 어쩌다 수영장에 빠진 거냐며 물었다. “제가 봤어요. 가희 씨가 유진을 밀어서 수영장에 빠지게 한걸.” 최유진의 옆에 있던 곽은영이 입을 열었다. 곽씨 가문의 막내, 곽명철 셋째 아들의 딸인 곽은영은 어려서부터 최유진과 사이가 좋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든 사람의 시선이 심가희를 향했다. 곽도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유진을 밀었어?” “아니라고 하면 믿겠어요?” 심가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아직 화가 덜 풀린 건 이해하지만...” “방금 수영장 근처에 나랑 최유진만 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은영 씨는 어떻게 내가 밀었다고 확신하지?” 그녀는 대뜸 곽도현의 말을 끊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에 더 들어볼 필요도 없었고, 가뿐히 무시한 채 곽은영에게 물었다. “거실에서 나오다가 우연히 목격했어요. 왜요?” “수영장까지 거리가 꽤 될 텐데, 거기다 나무도 많고. 시력이 정말 좋으시네.” 심가희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하자 곽은영의 표정이 어딘가 어색해졌다. “게다가 굳이 유진을 수영장에 빠뜨릴 이유도 없지.” 이내 멈칫하다가 최유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한테 미안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최유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크흠... 수영장이 미끄러워서 언니랑 같이 실수로 빠진 거예요. 흠...” 이때, 곽명철이 얼른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히라고 말하면서 상황을 일단락했다. 곽도현은 발목을 삐끗한 최유진을 데리고 심가희에게 말했다. “유진이가 걷지를 못하니까 부축 좀 해줘야겠어. 너도 얼른 들어가 있어. 감기 걸릴라.” 말을 마치고 나서 최유진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녀는 어깨 너머로 심가희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조금 전 최유진에게 한 방 먹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곽도현의 마음속에 누가 더 중요한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마침 식사 시간이 다가왔다. 모든 사람이 식탁에 모여 앉았다. “첫째 도련님께서 오셨어요.” 집사가 말했다. 곽명철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 일가족이 일제히 일어났다. 심가희도 고개를 들었다. 병풍 뒤에서 키가 크고 훤칠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깊은 눈매와 은테 안경,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 막 샤워를 마쳤는지 머리카락에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남자는 차례로 인사하고 곽명철 앞으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네 아버지는 잘 있냐?” 곽지환은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무탈하십니다. 최근 며칠은 어머니와 함께 시찰하러 가서 집에 못 오셨어요. 두 분 다 할아버지께 안부 전해 달라고 했어요.” 곽명철의 큰아들은 정치계에 몸담고 있어 본가에는 거의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본인 또한 그런 상황을 잘 알기에 불만이 없었고 둘째와 셋째 아들에게도 항상 신중히 처신하라고 당부했다.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거라.” 오랜만에 본 장손이 반가운지 곽명철의 눈빛에는 다정함과 약간의 원망이 섞여 있었다. “요즘 일은 어때? 바빠? 부모님은 못 온다 쳐도 너까지 할아버지 외면할 셈이냐? 얼마 전에 연락해서 망정이지, 아예 돌아올 생각도 없었지?” 곽지환은 시선을 내리깐 채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제 불찰입니다.” “아버지, 지환은 해운시 건설기술연구원의 수석 디자이너잖아요. 일이 워낙 바쁘니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곽명철의 둘째 아들이자 곽도현의 아버지, 곽동진이 입을 열었다. “음식 식겠어요. 식사하면서 이야기하죠.” 사람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방금 집사가 곽명철에게 보고한 덕분에 곽지환이 심가희를 구해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내 곁에 앉아 있는 그에게 말했다. “네가 구한 아이는 심우진의 딸이야. 다음 달에 도현과 결혼 예정이거든. 어렸을 때 만난 적 있지?” 곽지환을 발견한 순간 심가희는 온몸이 굳어 버렸다. 그날 밤의 남자가 곽씨 가문의 장손이자 곽도현의 사촌 형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더구나 그런 사람과 잠까지 잤다니! 당혹, 충격, 경악이 뒤섞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곽도현이 다정하게 반찬을 집어주며 나지막이 속삭이는 말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형이 널 구하러 가니까 유진부터 챙겨준 거였어. 오해하지 마.” “할 말이 있으면 집에 가서 하자. 괜히 할아버지 기분만 망칠라.” 다리를 툭 건드리는 느낌이 들자 그제야 곽도현의 말이 들렸고, 동시에 곽명철이 방금 자신을 불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드는 순간 곽지환과 시선이 마주쳤다. 도도하면서 준수한 얼굴, 그윽한 눈동자에는 그날 밤의 뜨거운 욕망이 온데간데없었다. 남아 있는 건 오직 무심함과 냉담함뿐. “기억 안 납니다.” 입술을 달싹이며 차갑게 내뱉은 한 마디. 심가희는 어리둥절했다. 방금 곽명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가희는? 지환이 기억나?” 곽명철이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 속의 곽지환은 지난 밤 거칠고 광기에 가까운 그 남자였다. 곽씨 가문 장남에 대한 인상은 사실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어릴 적 나이 차이가 좀 났다는 이유로 늘 무리에서 동떨어져 함께 어울려 놀 일도 없었다. 나중에 분가하고 나서는 곽지환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얼굴도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지환 형이 워낙 본가에 짧게 있어서 아마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형도 너무 신경 쓰지 마. 다음 달에 시간 되면 꼭 우리 결혼식에 와 줘.” 심가희가 묵묵부답하자 곽도현이 대신 말했다. 곽지환이 심가희를 힐긋 쳐다보았다. “축하한다. 시간이 맞으면 꼭 갈게.” “지환이가 형인데 설마 안 오겠냐?” 곽동진이 싱글벙글 웃었다. 곽지환은 곽씨 가문 장남 집안을 대표하는 인물인 만큼 그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사업상 정책적 지원받을 가능성도 커진다. 따라서 곽성 그룹의 회장으로서 회사를 더욱 성장시킬 수 있을뿐더러 후계자로서 아들의 입지도 한층 더 확고해지므로 셋째 집안은 자연히 경쟁할 기회를 잃게 된다. “됐어, 다들 식사하자.” 곽명철이 말했다. 심가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곽지환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클럽 안이 워낙 어두컴컴했고 술에 취해 있던 자기 모습을 떠올리면 기억할 리 없었다. 점심 식사 후 곽도현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지만 최유진도 함께 사라졌다. 어차피 알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곽지환도 있기에 얼른 자리를 뜨기로 마음먹었다. “갈려고? 마침 같은 방향이니까 같이 가.” 등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가희는 흠칫 놀랐다. 이내 곽지환을 바라보며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어차피 길이 달라요.” “내가 어디 가는지는 알고? 아니면...” 곽지환은 멈칫하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심가희는 괜히 등골이 오싹했다. “고작 20만 원으로 먹튀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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