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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못 잊겠어?

심가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으면서 등에 식은땀이 났다. 그녀를 이미 알아보다니! 운전기사가 뒷좌석 문을 열어주자 곽지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 마치 그녀가 타기를 기다리는 듯 문은 열려 있었다. 심가희는 괜스레 불안했다. 행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까 봐 꾸역꾸역 몸을 쑤셔 넣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운전기사가 물었다. “곽성 그룹으로 가 주세요.” 말을 마치자 차 안은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그녀는 차 문에 바짝 붙어 앉았고 최대한 곽지환과 멀리 떨어지려고 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은 성인 한 명이 더 탈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어색한 분위기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심가희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아까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곽지환은 긴 다리를 꼰 채 시트에 등을 기대고 태블릿 화면의 도면을 보고 있었다. 다크 계열의 캐주얼 차림에도 시크한 매력은 여전했다. 말을 마치고 나서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지난밤의 상황에 대해 이제라도 분명하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내 용기를 내어 목을 가다듬었다. “그날은 제가 술을 많이 마셔서... 어... 죄송해요. 사과드릴게요.” 그리고 몸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손바닥에 어느덧 땀이 살짝 배어 있었다. “혹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약 먹었어?” 곽지환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불쑥 끼어들었다. 결국 심가희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도로 삼켰다. “네?” 그녀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남자는 비로소 태블릿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은테 안경 너머로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맞닥뜨렸다. 가까이서 그것도 대낮에 봐서 그런지 눈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짙고 풍성한 속눈썹, 새까만 눈동자는 그윽하면서도 어딘가 사람을 사로잡는 강한 매력을 지녔다. 시선이 아래로 향하자 옷깃 사이로 살짝 드러난 목젖이 눈에 들어왔다. 겉옷에 감춰진 단단하고 넓은 어깨, 그리고 탄탄한 가슴까지. 머릿속에 그날 밤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잘록한 허리, 선명하게 드러난 복근... “못 잊겠어?” 곽지환의 목소리에 그녀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위험천만한 눈빛 속에 비웃음 섞인 묘한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심가희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황급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전기사는 차를 잠시 길가에 대고 근처 약국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비닐봉지를 들고나와 곽지환에게 건넸다. 심가희가 곁눈질하는 찰나 어느새 앞에 툭 하고 놓였다. “이따 가서 먹어.” “저 주려고 산 거였어요?”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봉지에 든 약을 꺼냈다. 하지만 케이스에 적힌 글자를 보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피임약이었다. 그날 밤 마지막으로 절정에 치닫는 순간은 무방비 상태였다. 민망함이 물밀듯이 밀려왔고 심가희는 가시방석에 앉은 듯했다. “알았어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을 떠올리자 다시 말을 꺼냈다. “지난밤은... 없었던 일로 해주면 안 될까요?” 이때, 곽지환의 휴대폰이 울렸다. 심가희는 그가 전화를 다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통화를 마친 곽지환은 대답 대신 싸늘하게 한마디 했다. “가는 길이 다르니까 내려.” 조금 전만 해도 데려다준다더니 이제 와서 방향이 다르다고? 뒷좌석에서 내린 심가희는 점점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았다. 당최 속내를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대체 어느 대목에서 심기가 불편해진 걸까? 하지만 태도를 봐서는 그날 밤의 일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 건 매한가지인 듯했다. 어쨌거나 입장이 동일하면 그만이었다. 오후 내내 곽도현은 회사에 없었다. 방금 전화를 걸어 왜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가버렸냐고 물어보고 나서 감감무소식이었다. “도현 씨가 어디 있는지 몰랐어요.” 심가희는 무덤덤하게 사실대로 말했다. “괜찮아. 네가 회사에 있는 거 알았으니까 됐어. DH에서 신상 백이 나왔길래 별장으로 보내달라고 했어. 이따가 가서 마음에 드는지 봐봐.” 왜 사라졌는지는 설명도 없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거기다 가방으로 입막음까지 하려고 했다. 마치 수영장 소동은 애초에 없었던 일인 듯. 심가희는 조소를 머금었다. 어차피 신경도 안 쓰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별장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6개월 전 약혼하고 나서 그녀는 곽도현의 집으로 이사했다. 같은 지붕 아래 살지만 각방을 썼고 늘 애지중지 아끼며 배려하는 척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결혼 전에 손가락 하나 건드릴 수 없다고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냥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지금은 한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거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사하기로 결심했다. 별장에 도착해서 발을 들이는 순간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손재주가 없어서 아쉬운 대로 하고 계세요. 삼촌.” 현관을 지나 거실에 들어서자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곽도현에게 넥타이를 매주는 최유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내 인기척이 느껴지는 듯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최유진은 활짝 웃으면서 마중 나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언니, 이 넥타이가 더 예쁘지 않아요? 아까 그거보다 삼촌한테 훨씬 잘 어울리죠?” 수영장에서 봤던 도발적인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 한편, 회색 베스트에 흰 셔츠를 받쳐 입은 곽도현의 목에 와인색 넥타이가 비뚤게 걸려 있었다. 그리고 원래 했던 그녀가 직접 고른 스프라이트 네이비 넥타이는 거실 테이블 다리 옆에 버려졌다. 심가희는 넥타이를 선물했던 날이 떠올랐다. 곽도현은 선물 받자마자 직접 매 달라고 했고, 며칠 동안 주구장창 착용하고 다녔다. 바닥으로 향한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최유진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언니가 삼촌한테 선물한 넥타이인 줄 몰랐어요. 화난 거 아니죠?” 사과는 말뿐이고 눈에 미안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넥타이 하나 가지고 무슨.” 심가희는 피식 웃었다. “계속해.” 말을 마치고 뒤돌아섰다. “이깟 넥타이가 뭐라고, 신경 쓰지 마.” 곽도현이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자기를 구해줬다고 고마워서 선물한 거야.” 약혼자를 내버려 두고 다른 여자를 구해준 대가로 받은 선물이라. 심가희는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 제 잘못이에요. 가희 언니 화났나 봐요. 죄송해요, 전 먼저 가볼게요.” 최유진은 상처받은 표정으로 뛰쳐나갔다. 운전기사에게 그녀를 본가로 데려다주라고 지시하고 나서 곽도현은 심가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꼭 시비 걸어야 속이 후련해?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본가에서 그런 소란을 피우고 인사도 없이 혼자 가버리는 건 아니잖아. 할아버지께서 아시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다시 말해서 곽도현은 그녀가 최유진을 밀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고, 괜히 딴지 건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이 한순간 폭발했다. “오히려 다행이네요. 이참에 결혼식도 취소하고 갈라서요.” 곽도현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내가 말했지? 최유진은 내 조카라고.” “어느 조카가 삼촌한테 넥타이를 선물하죠?” 심가희는 그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넥타이는 아무한테나 주는 선물이 아닌 거 몰랐어요?” 곽도현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최유진의 편을 들어주었다. 얼마나 노골적인 편애인가? 심가희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갔고 다시 말을 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하여튼 최유진을 민 적이 없어요. 나 수영 못하는 거 도현 씨도 알잖아요.” 심가희는 물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곽도현도 근처에 가지 못하게 했고 심지어 반신욕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이 없는 틈에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가 바로 곁에 있었다. “오늘 밤 짐 싸서 나갈래요. 결혼식은 취소할 거라고 기회를 봐서 할아버지께 말씀드릴게요.” 8년간의 사랑은 오늘부로 끝이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곽도현이 급히 따라붙었다. “안 돼! 정 믿기지 않는다면 행동으로 보여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이 붕 떠올랐다. 곽도현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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