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뒤늦게 따라온 진태하는 집을 한번 둘러보다가 이하음의 시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석범 쪽을 바라보았다.
이석범의 바로 옆에는 키가 크고 짙은 화장을 한 여성 한 명이 있었다.
예쁜 얼굴이기는 했지만 연한 화장에도 얼굴에서 빛이 나는 이하음을 보고 난 뒤라 그런지 썩 놀랍지는 않았다.
‘저 여자가 바로 내 약혼녀인가 보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이하음이 앞으로 달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석범의 뒤에 있던 이운산은 이하음을 보자마자 몸을 움찔하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금방 다시 원래 얼굴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미 이하음에게 모든 표정을 다 들켜버린 뒤였다.
이석범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하음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왜 이제야 왔어.”
이하음이 뭐라 답하려는데 이혜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연락을 받았으면 바로 출발했어야지 이제 오면 어떡해? 너는 할아버지 말이 말 같지 않아?”
“그럴 리 없잖아. 오는 길에 사고가 좀 있었을 뿐이야. 이분 덕에 무사히 도착한 거고.”
이하음은 그렇게 말하며 진태하를 바라보았다.
이혜정은 그녀의 말에 차갑게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
“핑계를 대도 그럴듯한 핑계를 대야지. 그냥 솔직히 말해. 남자랑 재미 좀 보다 늦었다고.”
“언니,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이분과 나는 오늘 처음 본 사이야. 나보다는...”
“아무 사이도 아니면 빨리 내보내지 않고 뭐해? 오늘 무슨 날인지 잊었어? 늦게 온 것도 봐줄까 말까인데 오늘 같은 날 감히 외부인을 들여?”
이혜정은 꾸짖듯 말하고는 진태하를 힐끔 바라보았다.
‘어디서 골라도 저런 거지 같은 남자를, 쯧쯧.’
이석범은 이혜정의 말에 그제야 진태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태하를 본 그는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야 말았다.
지나치게 검소한 옷차림이기는 하나 단단한 골격 하며 그저 서 있는데도 절로 풍기는 분위기 하며 한눈에 봐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자네는 누구인가?”
이석범의 질문에 진태하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진태하라고 합니다. 스승님의 존함은 진 강자 호자시며 오늘은 스승님의 명으로 혼인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진태하는 인사를 마친 후 스승님이 두고 간 옥패를 이석범에게 건넸다.
“어쩐지 기운부터 범상치 않더라니 대종사님의 제자였구만!”
이석범은 감격한 얼굴로 환하게 웃더니 지팡이까지 내던지며 진태하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꽉 맞잡고 말했다.
“바로 어제 자네가 오늘 이곳으로 올 거라는 편지를 받았네. 잘 왔어. 아주 잘 왔어. 앞으로는 이곳을 자네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지내게나. 원하는 거 있으면 나한테 뭐든 말하고. 자주 볼 사이인데 지금부터 편히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나?”
이석범의 얼굴에 어려있던 위엄은 어느새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환한 미소만 걸려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하음은 눈을 크게 뜬 채 깜짝 놀라며 진태하의 신분이 다시금 궁금해졌다.
‘설마 이 남자가 오늘 온다는 중요한 손님인 건가?’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럼 사양하지 않고 편히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이름은 편하신 대로 불러주세요.”
진태하는 예상 못 한 환대에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할아버지, 오늘은 재산을 어떻게 나눌 건지에 대해 얘기하기로 하셨잖아요.”
그때 기다리다 지친 이혜정이 이석범의 팔을 잡으며 애교를 부렸다.
“그러니까 빨리 말해주세요. 저 일 때문에 빨리 가봐야 한단 말이에요. 미리 얘기하지만 회사 지분은 저한테 제일 많이 주셔야 해요. 알겠죠, 할아버지?”
당돌한 그녀의 말에도 이석범은 화를 내기는커녕 소리 내 웃기만 했다.
“그래, 네가 원하는 건 다 주마. 네 결혼 상대도 이 할애비가 너를 위해 다 정해두었다.”
“네?”
이혜정은 그 말에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혹시 나랑 영훈 씨가 사귀는 거 아셨나?’
“혜정아, 여기 있는 태하가 바로 네 약혼자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 이대로 혼인신고까지 하고 오거라.”
이석범이 진태하와 이혜정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네?!”
이혜정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가문 사람들 역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해가 잘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이석범이라면 분명 사랑하는 손녀를 위해 사위도 강주시에서 제일 큰 가문의 후계자로 점찍어뒀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제대로 된 양복 한 벌 없을 것 같은 남자에게 시집보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싫어요!”
이혜정이 질색하며 거절했다.
“혜정아, 할애비가 점찍어둔 짝이다. 할애비 말 들어서 이제껏 손해 본 적 있어? 그러니 이번에도 할애비 말대로 해.”
이혜정은 그 말에 이석범의 팔을 홱 뿌리치며 화를 냈다.
“할아버지, 저 사람 생긴 것 좀 봐요. 누가 봐도 이제 막 밭매고 온 얼굴이잖아요! 시골 촌뜨기한테 내가 시집을 왜 가요!”
진태하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막말을 내뱉는 그녀를 보며 서서히 미소를 거두어들였다.
“저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그러면 저도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거절을 해도 예의 있게 하시길 충고드립니다. 밭을 매는 일이 아가씨가 생각하시는 것만큼 허접한 일은 아니라서요.”
진태하는 부자가 아니다. 돈이 별로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된 건 이제껏 의뢰인들에게서 받은 수고비를 전부 다 아이들을 위해 산골 학교를 세우는 데 썼기 때문이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기분이 나빴나 보죠?”
이혜정은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진태하를 흘기고는 자신의 손을 척 내밀었다. 그녀의 약지에는 진주알만 한 크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이거 영훈 씨가 나한테 선물해 준 프러포즈 반지예요. 10억 원은 족히 넘죠. 그쪽은 이런 반지를 평생에 걸쳐도 못 살 걸요?”
“프러포즈라니?”
이석범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혜정은 이렇게 된 거 사실대로 다 말하려는 듯 이석범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할아버지, 저 영훈 씨 프러포즈 수락했어요. 최씨 가문 아시죠? 그 가문의 후계자예요. 만약 제가 영훈 씨랑 결혼하게 되면 우리 두 가문은 지금보다 더 단단하게 연결될 거고 그렇게 되면 회사도 더 크게 발전할 거예요!”
이석범은 이를 부들부들 떨더니 이혜정에게 삿대질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이 어리석은 것! 당장 그 반지를 최씨 가문에 돌려주고 와!”
그때 장남인 이운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버지, 프러포즈까지 수락했는데 돌려주긴 뭘 돌려줘요? 게다가 최씨 가문에서 보인 성의 표시도 이미 받았단 말이에요. 4백억 원이 들어있는 카드에 2천억짜리 투자까지 해주기로 했어요. 이 정도면 혼수나 다름없죠. 이것만 봐도 저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도 모를 놈보다는 훨씬 낫구만 왜 자꾸...”
짝!
이석범이 이운산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이런 멍청한 것! 최씨 가문의 그 별 볼 일 없는 것을 감히 혜정이한테 갖다 붙일 생각을 해?”
이운산은 뺨을 맞은 게 매우 분하고 속이 상했지만 뭐라 대꾸하지는 못했다.
이혜정은 이석범과 말이 통하지 않자 아예 통보하듯 얘기해 버렸다.
“아무튼 제가 이 남자랑 결혼할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너...!”
이석범이 분노로 곧 쓰러질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이운해가 빠르게 다가와 그의 화를 누그러트려 주었다.
“아버지, 일단 심호흡부터 하세요.”
한편 이하음은 지금 마음이 상당히 복잡하고 또 묘했다. 이혜정 때문에 할아버지가 화를 낸 건 오늘이 처음이었으니까.
이혜정이 큰 사고를 쳤을 때도 할아버지는 늘 괜찮다고 말하며 그녀에게 욕 한번 하지 않았다. 또한 이혜정이 하늘의 별을 따달라고 하면 달까지 따다 줄 수 있다며 늘 그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그랬던 할아버지가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고집을 부렸다.
‘할아버지의 평소 행동대로라면 지금쯤 언니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줘야 하는데? 갑자기 왜 이러시지? 왜 결혼은... 설마!’
이하음은 뭔가 떠오른 듯 진태하 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남자 때문이야. 저 남자를 꼭 잡아야 하니까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시는 거야!’
이하음은 주먹을 꽉 말아쥐며 뭔가를 결심했다.
‘이건 도박이야. 이건 내 남은 인생이 걸린 두 번 다시 없을 도박이야.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뒤집을 기회가 없어!’
“언니가 마다한 결혼, 제가 할게요.”
그녀의 말에 분위기가 한순간에 변해버렸다. 가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 얼굴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