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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이혜정은 이석범이 자신을 위해 사준 별장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고작 집 한 채일 뿐이지만 그 가치는 몇백억 원이었으니까. 이석범은 이혜정을 한번 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집은 내가 태하에게 주는 신혼집이다. 결혼을 거절한 건 너니까 이제 그 집은 너와 아무런 상관도 없어야 하는 게 맞지!” 이혜정은 180도 바뀐 할아버지의 태도에 얼른 애교를 부렸다. “할아버지, 레이만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할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제가 레이만으로 들어가게 되면 더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연을 쌓을 수 있게 되는데 정말 안 주실 거예요?” 사실 인맥을 쌓는 건 부가적인 것이었다. 그녀가 레이만 별장을 사수하고 싶은 건 부모님이 그 별장으로 들어가게 되면 최씨 가문과 왕래할 때 관계가 더 돈독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석범은 생각보다 더 단호했다. “이미 결정한 일이니 그렇게 알아!” 이혜정은 혼인을 거절함으로써 그의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려 놓았다. 진태하가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 다행이지 아니면 진강호를 다시 만났을 때 석고대죄부터 해야 했을 것이다. 이석범이 이혜정을 유독 예뻐했던 것도 다 그녀가 진태하의 약혼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 약혼녀 자리는 이하음의 것이 되어버렸다. 즉, 그렇다는 건 더 이상 이운산네 가족을 지나치게 챙겨줄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었다. “할아버지...” 이혜정이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석범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애교 한 번이면 뭐든 받아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장 변호사, 지금 당장 가서 명의를 이전해 놓게!” 이석범이 단호한 얼굴로 장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네, 알겠습니다.” 장 변호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얼른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혜정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돌려 이하음과 진태하를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할아버지가 왜 저런 촌뜨기를 예뻐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운산의 눈빛도 이혜정 못지않게 매우 날카로웠다. 심지어 살기도 언뜻 보이는 듯했다. 진태하는 그런 이운산을 한번 보고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그도 아까 이하음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본 이운산의 표정이 아주 잠깐 다채롭게 변했던 것을 봤었다. 그래서 이운산이 바로 살수들에게 의뢰한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이하음은 한영애의 팔을 잡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엄마, 내 추측이 맞았어요. 할아버지가 더 신경 쓰고 있었던 건 진태하 씨지 언니가 아니었어요.” 이석범이 레이만 별장을 준다는 건 그만큼 진태하가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이하음도 한때는 열심히 회사를 경영해 부모님에게 레이만에 있는 별장 한 채를 사주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고 세상은 그녀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2년도 못 버티고 회사 자체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빛처럼 나타난 사람이 바로 진태하였고 그들의 걱정은 오늘로써 완전히 끝이었다. 이석범은 진태하를 자신의 친손주처럼 여기고 있기에 분명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줄 것이다. “우리 딸이 최고야! 누구처럼 일을 그르치는 법 없이 아주 훌륭하게 잘 커 줬어!” 한영애는 진태하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틈만 나면 날 흉보지 못해서 안달이지 아주!’ 이운해는 아내의 말에 기분이 상한 듯 뭐라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석범은 가족과 친척들을 다 제쳐두고 진태하의 손을 잡은 채 함께 식탁으로 가 나란히 앉았다. 이혜정은 이운산이 잠깐 밖으로 나간 사이, 이하음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그까짓 별장 한 채 얻었다고 너무 기고만장해하지 마. 내가 너한테 양보한 거니까. 그리고 그 촌뜨기 같은 남자도 내가 버린 쓰레기일 뿐이니까 없어 보이게 너무 좋아하지 마. 할아버지가 그 촌뜨기를 아무리 좋아해도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으니까. 내가 영훈 씨랑 결혼하게 되면 너는 지금처럼 나랑 눈도 못 마주치게 될 거야.” 이혜정은 마음속에 쌓인 분노를 전부 다 이하음에게 쏟아부었다. 이하음은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이혜정을 노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그쯤 해. 나 이제껏 언니 많이 참아줬어.” 지난 수년간, 이하음은 이혜정이 이런 식으로 말할 때면 늘 꾹 참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이혜정, 너도 이제는 어린애 아니니까 그딴 식으로 말하는 것 좀 고쳐!” 이운해가 이하음을 자기 뒤로 보내며 말했다. 하지만 그간 이석범이 이혜정을 얼마나 예뻐했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봤던 그였기에 더 심한 말은 하지 못했다. 한영애는 그런 남편의 태도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를 확 밀쳐버리고는 무서운 눈빛으로 이혜정을 제압했다. “어떻게, 다시는 그 입 함부로 놀리지 못하게 만들어 줘?” 이혜정은 그녀의 눈빛이 불편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자꾸 시선을 피하려고 했다. 한영애는 단지 명문 가문 출신일 뿐만 아니라 경남 대학교 회계학과를 전공한 엘리트였다. 이운해의 회사가 지금껏 계속 버틸 수 있었던 건 다 그녀가 기둥처럼 버티고 있어서였다. “어디 언제까지 기세등등할 수 있나 보자고요!” 이혜정은 그렇게 말하고는 식탁 쪽으로 향했다. 한영애는 뒤를 돌더니 이하음을 바라보며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하음아, 너는 다 좋은데 너희 아빠 닮아서 성격이 너무 물러. 그런 성격으로는 기회가 와도 못 잡을 거야. 앞으로는 재무팀을 돌면서 엄마가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 보고 배워!” “네, 엄마.” 이하음은 눈물을 닦아낸 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진태하는 이석범 술잔에 세 번 연속 술을 따르며 석 잔 모두 원샷했다. 이석범은 세 번째 잔을 들 때부터 이미 취한 듯해 보였고 말도 조금 어눌하게 나왔다. “태하야, 결혼 약속은 정말 미안하다. 네 스승님 얼굴을 볼 낯이 없어.” “어르신, 그런 말씀 마세요.” “어르신 말고 앞으로는 할아버지라고 불러. 나도 널 태하라고 부르잖아.” “할아버지, 혼인 같은 인생 중대사는 강압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는 이하음 씨가 이혜정 씨보다 훨씬 더 훌륭한 분 같아요. 그러니 저는 오히려 할아버지께 감사해야 하죠.” 진태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쩜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할까. 역시 그분의 제자다워. 하음이도 알아야 할 텐데. 너한테 시집가는 게 얼마나 큰 복이고 행운인지.” 이석범은 기분 좋은 듯 활짝 웃으며 술잔을 내밀었다. “자, 다시 술잔 가득 따라봐. 우리 손녀사위랑 더 마셔야겠으니까.” “아버지, 더 이상은 안 돼요!” 이운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술잔을 아예 치워버렸다. “기분이 좋아서 몇 잔 더 마시겠다는데 술잔을 왜 가져가? 이리 안 내?” 진태하의 시선이 이석범의 얼굴로 향했다. 얼굴이 누렇고 눈이 퉁퉁 부었으며 입술이 하얗게 변했다는 건 위와 장이 안 좋다는 신호였다. “할아버지, 아무래도 오늘은 이만 마시는 게 좋겠어요. 그보다 혹시 제가 진맥을 해봐도 될까요?” 진태하의 말에 이운해가 갑자기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진맥도 할 줄 아나?” 그러자 이석범이 이운해를 한번 노려보았다. “그분의 제자인데 그럼 모르겠어?” 이운해는 이석범의 호통에 입을 삐죽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대체 그분이 누구길래 이토록 신봉하는 거야? 이제껏 들은 것만 가지고 종합해 보면 영락없는 사기꾼인데.’ “고질병이라 약 먹으면 금방 나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석범이 손을 휘휘 저으며 진맥을 거부했다. 진태하는 이석범의 눈가에 잠깐 스친 무력함을 보고는 순순히 알겠다고 했다. “혹시라도 몸이 불편하거나 하시면 언제든지 저한테 얘기하세요.” ‘내가 뭔가를 알아차릴까 봐 두려우신가 보네. 하지만...’ 진태하는 역시 안 되겠는지 모든 기운을 눈에 집중해 이석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2초도 안 돼 진단을 끝냈다. ‘이런, 위에 종양이 있네. 그것도 악성 종양이... 이씨 가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아예 모르는 건가?’ “하하하, 얼른 먹어. 이러다 다 식어버리겠네.” 이석범이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이에 진태하도 별다른 말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마지막 의뢰를 받은 지도 어언 3년, 지난 3년간 진태하는 육식을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러다 오늘, 드디어 오랜만에 고기를 먹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후, 이하음은 진태하와 함께 별장에서 나왔다. 두 사람이 떠나기 전, 이석범은 현관문 밖으로까지 배웅을 나오며 손을 흔들었다. “얼른 혼인 신고해!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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