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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머리를 다 말린 진태하는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를 훑었다. 그때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고 그는 저도 모르게 욕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커튼이 쳐져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곧 부부가 될 텐데 뭘 저렇게 꼭꼭 감추지?” 그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웬 아련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내가 형 전화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꼭 독수공방하다가 5년 만에 남편을 본 새색시가 된 기분이야. 내가 형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면 형은 아마...” “시끄러워.” “넵.”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진태하가 물었다. “그게... 알아내기는 했는데...” “말해봐.” “20년 전에 엄씨 마을에서 아주 큰 화재가 났었어. 그 광경을 마침 하산했다가 마을에 들르게 된 진강호 어르신이 보게 됐고. 어르신이 그 화재에서 구한 사람은 총 두 명이야. 한 명은 2살 정도 된 아이였고 다른 한 명은 노인이었어. 화재 사건이 있은 1년 뒤부터 어르신이 어린아이 한 명을 곁에 끼고 다니기 시작했어. 화재에서 구출해 낸 그 아이를 자기가 키우기로 한 거지. 그 아이가 바로 형이었던 거야.” “나와 함께 구출된 노인은?” “그 노인은 이석범이고.” “알아낸 건 그게 다야?” 진태하의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마을 전체가 다 타버렸고 생존자가 거의 없었다는 건 누군가가 그 마을을 없애려고 했다는 건데...” “거기까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어. 알아내게 되면 바로 형한테 연락할게.” “그래.” 진태하는 전화를 끊은 후 천천히 소파에 누웠다. 사실 그는 아주 어릴 때 스승님을 자신의 친할아버지라고 생각했었다. 부모님에 관해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스승님은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입을 꾹 닫은 채 아예 자리를 피해버렸다. 그렇게 근 20여 년간 그는 줄곧 부모가 누군지 모른 채로 살았다. 그러다 3년 전, 안씨 가문의 의뢰로 암흑대룡이라는 살수를 처리했을 때 안씨 가문 도련님인 안성재와 친분을 쌓게 되었고 얘기를 나누다 안성재가 국내의 탐정 사무소를 전부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태하는 그때 기회라고 생각했고 안성재에게 보수는 됐으니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그 일을 알게 된 진강호는 그를 3년이나 밖으로 나돌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의뢰는 이미 한 상태였고 진태하는 안성재가 전해준 자료로 모든 걸 다 알게 되었다. 진강호가 그에게 부모님에 관해 아무것도 얘기해 주지 않았던 건 그의 일가족이 전부 몰살당했기 때문이었다. 사실을 알게 된 진태하가 복수심으로 해서는 안 될 짓을 할까 봐 줄곧 비밀로 해왔던 것이었다. 그래서 진강호는 진태하가 모든 수련을 다 마치고 나서야 천원산을 떠났고 그제야 이석범을 찾아가게 했다. 달칵.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핑크색 잠옷을 입은 이하음이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밖으로 나왔다. 이하음은 두 손을 뒤로 모은 상태로 쭈뼛거리며 진태하에게 말했다. “저기... 그 속옷 말이에요. 빨다가 다 해져버렸어요.” 진태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속옷은 아까 샤워를 마치고 쓰레기통에 버렸을 텐데요...?” 진태하는 하산 금지를 당한 그 3년간, 팬티 한 장으로 버텼다. 거의 매일 빨았기에 언제부턴가 걸레보다 더 너덜너덜해진 상태가 되어있었다. “버리는 거라니... 그럼 잘 좀 버리지 그랬어요!” ‘버리는 건 줄도 모르고 그걸... 아, 쪽팔려!’ 이하음은 거품을 내고 몇 번 문지르자마자 바로 해져버리는 팬티를 보며 어떻게 해야 하나 미친 듯이 고민했던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뒤에 숨긴 건 뭐예요?” 진태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이하음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이에 이하음은 살짝 움찔하더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외치고는 얼른 쓰레기통 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이하음이 팩을 한 채로 진태하의 옆으로 다가왔다. “태하 씨가 침대에서 자요. 나는 소파에서 잘게요.” 진태하는 그 말에 속으로 피식 웃더니 일부러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결혼할 사이인데 같이 안 자요?” 이하음의 움직임이 멈춰버렸다. “나... 나는 아직 그럴 생각이...” 진태하는 그녀의 당황한 얼굴이 재밌는지 이번에는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까지 내쉬었다. “나도 알아요. 하음 씨가 나랑 결혼하기로 한 건 그저 나를 이용해 할아버지 재산을 얻고 싶어서일 뿐이라는 걸.” 이하음은 그 말에 당황한 듯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나는...” 진태하는 천천히 눈을 감은 후 담요를 덮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이하음 씨가 나한테 첫눈에 반했을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나도 단지 스승님이 약속한 혼인을 깨고 싶지 않았을 뿐이고.’ “태하 씨,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이하음이 소파 옆으로 와 무릎을 구부렸다. 해명하고 싶은데 뭐라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 사실 진태하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실제로 진태하와의 결혼을 통해 할아버지의 지원을 얻고 싶었으니까. 죽어가고 있는 화양 테크를 다시 살리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진태하를 단지 도구로 이용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증거로 그녀는 지금 누군가가 심장을 꽉 조이고 있는 것처럼 아팠다. 심지어 눈물까지 멋대로 흘렀다. 진태하는 눈을 반쯤 떴다가 이하음의 눈물을 보고는 금세 마음이 약해져 얼른 그녀를 달랬다. “그냥 장난 좀 한 것뿐이에요. 원래 감정이라는 건 천천히 키워나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울지 말아요.” 이하음이 훌쩍이며 물었다. “정말이에요?” “네, 정말이에요. 그리고 미리 말하지만 우리 사이에 감정이 싹트기 전까지 나는 하음 씨 건드릴 생각 없어요. 하음 씨가 침대로 오라고 해도 안 갈 거예요.” 이하음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눈물을 닦아냈다. “정말 화 난 거 아니죠?” “네, 아니에요.” “그럼 앞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혼자 이상한 생각도 하지 말고요.” “네네, 그렇게 할게요.” 진태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이하음은 조금 피곤해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한 채 침대로 가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진태하는 육중한 물건이 떨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에 깜짝 놀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이하음이 침대에서 떨어진 소리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하음은 깨지 않았다. 진태하는 몸을 일으킨 후 침대 옆으로 가 이하음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매끈한 다리가 손바닥이 닿을 때 그는 순간 심장이 움찔하는 느낌이 들었다. 한창 혈기 왕성할 나이라 생리적 현상은 막을 수가 없었다. 진태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이하음을 침대 위에 내려놓은 후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몇 분간 스트레칭하더니 이내 운동복을 입고 조깅하러 갔다. 8시. 진태하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하음도 마침 아침밥을 다 만들었다. 하지만 1인분밖에 없었다. “어머 어떡해!” 이하음은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며 진태하를 바라보았다. “태하 씨 아침을 준비 못 했어요...” 줄곧 혼자 살았던 터라 습관적으로 1인분만 준비해 버렸다. 진태하는 그 말에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욕실 쪽으로 향했다. “나는 아직 배가 안 고파서 괜찮아요.” 깨끗하게 씻은 후 그는 수염을 밀고 흰 셔츠에 정장을 입었다. 거적때기를 벗어던지니 사람이 다 달라 보였다. 아무렇게나 머리를 내린 건데도 절로 나른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인상이 훨씬 더 부드러워 보였다. 이하음은 욕실에서 나온 그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움직임을 다 멈췄다. 어제와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에 비친 진태하는 드라마에서나 보던 잘생긴 재벌 2세 그 자체였다. 진태하는 넋을 잃은 듯한 이하음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그녀의 눈앞에서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완전히 넋이 나갔네? 내가 그렇게도 잘생겼어요?” 이하음은 그 말에 얼굴이 빨개져서는 우유를 벌컥벌컥 마셨다. “알면 앞으로는 잘 때 이불 꼭 덮고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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