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4장 마음속에 아직 그가 남아있다
“박지환 씨 스스로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잘 모르고 있는데다 일이 터지자 감히 나를 보러 올 엄두도 안 난다고 했어요. 완전히 퇴폐적인 사람 같아 보이는 건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면서...”
“서희야.”
서이준은 작은 소리로 그녀를 중단시켰다.
“그딴 설명을 믿어?”
“너를 다치게 만든 걸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어. 단지 질투 때문에 거리낌 없이 길거리에서 손찌검을 하는 모양새가 미친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고. 그런 사람이 진작에 정신병원에 갔어야지 왜 멀쩡하게 나돌아다니는 건지 이해가 안 돼.”
서이준은 탄식했다.
“혹시 아직도 차마 박지환을 놓지 못하는 거야?”
민서희는 얼떨결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게 아니라... 박지환 씨 정말로 정신상의 이상이 있었어요... 다만 그리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고 정신과 의사한테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에요.”
“사람한테 손찌검을 한 게 틀린 건 맞지만 그래도...”
“사람을 다치게 한 게 맞는데 그 어떤 핑계로도 설명이 못 돼.”
서이준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해 네 말대로 박지환이 정신상의 문제가 생겨서 그런 짓을 저지른 거라고 해도.”
“임신 중인 네가 박지환 앞에 나타날 자신이 있어? 또 이성을 잃게 되면 네 지금 몸 상태로 또 한 번 그리 큰 상처를 감당해 낼 수 있을까?”
민서희는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대로 민서희는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박지환도 그녀를 만나러 오지 않는 것이다.
눈을 아래로 떨군 민서희는 진동연의 말을 떠올리며 가슴이 찌릿거렸다.
분명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진동연이 박지환이 변해진 게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깨닫게 해주는 말투였으니 말이다.
지금은 호진은하고 함께 있는 박지환이 예전의 박지환이 맞을 수 있겠지만 나중에는?
박지환한테 상처를 받을 게 두려워 박지환을 밀어낸다면 박지환이 제대로 미치광이가 돼버릴 수도 있잖아? 호진은이 제멋대로 휘둘리는 정신병자가 될 수도 있다.
감히 생각을 이어갈 수 없는 민서희는 이마를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준 씨, 박지환 씨한테 불만이 많다는 거 저도 이해해요. 보통 상황이었으면 나도 그 사람을 상대하지도않았을 건데 지금 상황은 이준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상황이에요.”
“그리고 엄마를 구하고 나서부터 박지환 씨의 정신 상태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호진은이 주치의로서 박지환 씨가 가장 허약한 이 시점에 암시를 걸게 되면 박지환 씨가 예전의 박지환 씨가 아닐 수도 있어요.”
“적어도 박지환 씨가 제정신이라는 걸 확인해야 돼요. 근데 반대로 정신상에 문제가 생겼다면 호진은이 다른 짓을 벌이지 못하게 다 낳을 때까지 지켜봐야 하고요.”
침묵에 빠진 서이준은 어두컴컴한 눈빛으로 민서희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럼 너는? 다시 한번 너한테 손을 대게 되면 어떡할 건데?”
민서희는 눈을 감았다.
“화나게 하지 않게 최선을 다할게요. 나도 박지환 씨가... 스스로를 잘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한참이 지나 서이준은 실망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서희야, 네 마음속에 여전히 박지환이 있는 거야.”
눈빛이 흔들리는 민서희는 이불 속에 움츠린 손을 꽉 지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마음속에 박지환이 자리 잡고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월로가 묶어놓은 매듭이 얼마나 튼튼한지 그토록 실망이 쌓여가는데도 그가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순간 빠져나온 영혼은 제멋대로 원상복귀가 되니 말이다.
가슴 왼쪽 자리에는 습기 덩어리로 뭉쳐져 황폐하고 고갈된 그 무언가에 수분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매정하게 떼어 놓을 수 없다.
특히 박지환이 애당초 의기양양한 모습을 잃은데다 퇴폐적이라는 말을 들으니 마음속에 뭔가가 조여와 숨이 턱턱 막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