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며칠 뒤.
정확히 다섯 날이 지나서야 하선우는 강서진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두 손 가득 보양식 봉투를 들고 들어오던 하선우는 문턱을 넘자마자 민설아의 이마에 난 상처를 보고 눈이 둘로 커졌다.
“설아야, 이마는 왜 그래?”
하선우가 다급하게 물었다.
“네가 밀어서 다친 거야.”
민설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강서진 씨를 보러 갔을 때...”
하선우는 순간 얼어붙었다가 이내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그날은 너무 급했어. 형수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형한테 뭐라 말해야 할지...”
하선우는 보양식을 담은 주머니를 민설아에게 내밀었다.
“이건 네 것만 따로 사 온 거야. 설아야, 화 풀어... 응?”
민설아가 받지 않자 하선우는 목소리를 더 낮췄다.
“그럼... 다른 거로라도 보상할게. 곧 네 생일이잖아. 새로 레스토랑이 생겼대. 우리 외식하자. 응?”
“필요 없어.”
민설아는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설아야, 그러지 마. 화내도 좋고 날 욕해도 돼. 근데 나를 이렇게 무시하는 건... 제발 하지 마.”
민설아는 더 말을 섞을 생각이 없었고 그냥 등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하선우는 그런 모습을 보고 민설아가 화가 풀렸다고 착각했다.
며칠 뒤 하선우는 민설아를 억지로 서양식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하선우는 무언가를 본 듯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설아야, 당직병이 나 찾네. 급한 일인가 봐. 잠깐만.”
하선우가 허둥지둥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민설아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하선우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오른손으로 무심코 소매 단추를 만지작거린다는 건 자신도 몰랐다.
레스토랑의 불빛 아래 복도는 묘하게 어두웠고 민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복도 끝 모퉁이에서 그 장면을 보았다.
하선우가 강서진을 벽에 몰아세우고 있었다.
“오늘 설아 생일이라는 거 알면서...”
하선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숨 막힐 만큼 급했다.
“굳이 오늘 같은 날을 골라서 와야 했어요?”
강서진은 눈물 맺힌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진료소에서... 의사 선생님이 말했어요. 요 며칠에 임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그리고 하선우의 앞섶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선우 씨가 싫으면... 그냥 돌아갈게요...”
하선우는 등을 돌리려는 강서진을 손목을 낚아채 다시 벽에 붙였다.
그리고 깊숙이 입을 맞췄다.
“아니에요. 지금 여기서 서진 씨를 원해요.”
민설아의 두 발은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민설아는 이런 잔인한 장면으로부터 정말 도망치고 싶었다.
이런 잔인한 장면에서 한순간이라도 벗어나고 싶었지만 다리가 돌처럼 굳어 버려 한 발도 내디딜 수 없었다.
눈물이 흐를 듯 고여 시야를 흐리는데도, 둘의 뒤엉킨 그림자와 숨소리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하선우의 거친 숨소리와 강서진의 붉어진 목덜미, 그리고 둘 사이를 메운 뜨거운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문 탓에 목구멍 안에 피 냄새가 번지기 시작하자 그제야 민설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민설아는 온 힘을 쥐어 짜내 뒤돌아섰다.
비틀거리며 복도를 빠져나갈 때 심장은 칼날 위를 걷는 듯했다.
자리로 돌아와 앉아도 손끝은 떨렸고, 손바닥에 파인 손톱자국은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그럼에도 민설아는 이상하게 통증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 깊은 데서 밀려오는 고통이 더 컸기 때문이다.
“손님, 이제 음식을 올려도 될까요?”
종업원이 열 번도 넘게 물었지만 민설아는 기계처럼 고개를 저었다.
한참 뒤, 하선우가 돌아왔다.
하선우의 셔츠 깃 위에는 옅은 립스틱 자국이 번져 있었다.
“미안해. 좀 복잡한 일이라... 오래 기다렸지?”
곧이어 음식이 나오려던 찰나, 마치 짜기라도 한 듯 강서진이 나타났다.
“어머, 설아야, 여기에서 다 만나네? 나도 친구랑 오기로 했는데... 친구한테 바람맞았어. 같이 앉아도 될까?”
강서진은 민설아의 대답도 기다리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하선우의 옆에 앉았다.
하선우는 경고하듯 강서진을 흘겨보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식사가 시작되자 강서진은 서툰 손놀림으로 스테이크를 잘랐지만 칼날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 났지만 잘 잘리지 않았다.
“이것도 못 해요?”
하선우는 냉큼 강서진의 접시를 가져가 능숙하게 고기를 잘라 주었다.
“자, 먹어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민설아는 씹던 음식이 입안에서 돌처럼 굳는 느낌을 받았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레스토랑의 조명이 갑자기 낮아졌다.
촛대를 든 종업원이 다가와 환하게 웃었다.
“축하합니다. 두 분은 저희 가게 100번째 부부 고객이세요.”
종업원은 하선우와 강서진을 향해 말하면서 붉은 루비가 박힌 은팔찌를 내밀었다.
“기념으로 드립니다.”
“어머... 너무 예쁘네요!”
강서진은 감탄하며 그 팔찌를 바로 손목에 찼다.
하선우는 뭔가 말하려다 민설아의 창백한 얼굴을 스친 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뒤, 하선우는 낮게 말했다.
“오해해서 호칭을 잘못 쓴 것뿐이야. 너무 신경 쓰지 마.”
민설아는 숟가락으로 식어버린 수프를 천천히 젓다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민설아도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한때 평생 한사람만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던 하선우가 이제는 마음 한 조각을 다른 여자에게 떼어 주고도 미안해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민설아 역시 더는 하선우를 바라볼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