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어제 막 검사했어요...”
강서진은 숨이 끊어질 듯 들이켜며 울먹였다.
“선우 씨한테 아직 말도 못 했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민설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쥐어진 듯 꾹 조여왔다.
입술을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금세 입안에서 짠 피맛이 번졌다.
“울지 마세요. 출구부터 찾아요.”
민설아는 떨리는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어두운 공간을 살피더니 짙은 연기를 헤치고 겨우 창문 하나를 찾아냈다.
창문을 밀어 올리자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여기는 3층이었다.
바닥은 아찔할 만큼 멀리 내려다보였고, 순간 민설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로 그때였다.
계단 쪽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연기에 절어 헐떡거리던 하선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민설아가 창가에 서 있는 것을 본 그는 아래에서 팔을 활짝 벌렸다.
“설아야. 서진 씨, 얼른 뛰어. 내가 받을게!”
하선우의 목소리에는 다급함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설아야, 너 먼저 뛰어!”
민설아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살아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강서진이 비명을 지르며 민설아에게 덮쳤다.
“저 혼자 두지 마세요. 무서워요!”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이 균형을 잃고 창밖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하선우는 본능적으로 강서진 쪽으로 몸을 날렸다.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쿵!”
강서진은 하선우의 품 안으로 그대로 안겼고, 민설아는 콘크리트 바닥에 처박히며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팔다리로 통증이 번져 갔고, 등 뒤로는 따뜻한 피가 흘러내렸다.
그 순간, 민설아는 시야가 서서히 번져 가며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멀리서 하선우가 강서진의 어깨를 부드럽게 만지며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요? 어디 안 다쳤죠?”
하선우는 강서진의 상태만 확인한 채, 민설아 쪽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하선우는 뒤늦게 민설아를 발견했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설아야!”
하선우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민설아는 웃으려 했지만 입에서는 피 섞인 침만 가늘게 흘러나왔다.
‘참... 우습다. 이렇게 심하게 떨어졌는데, 이제서야 나를 보는구나.’
의식이 멀어지기 직전, 하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민설아는 이제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
약 냄새가 민설아의 코끝을 찔렀다.
민설아가 눈을 뜨자 천장이 보였고, 그 아래에서 하선우가 밤새 앉아 있었는지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
“설아야!”
하선우가 벌떡 일어났다.
“정말... 다행이네. 이제 정신 좀 들어?”
하선우는 급하게 민설아의 손을 잡았다.
“아까는 연기가 너무 심해서... 사람을 잘못 본 줄 알았어. 정말 미안해.”
민설아는 손을 천천히 빼냈다.
그 순간, 하선우의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떨리는 눈동자, 괜히 손가락 마디를 문지르는 버릇...
민설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선우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이렇게 했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 그 순간 하선우가 먼저 구하려 한 사람은 단연코 강서진이었다.
“아, 설아야!”
하선우의 표정이 환해졌다.
“좋은 소식이 있어. 형수님이... 임신했대!”
임신 이야기를 하는 하선우의 표정은 민설아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태어나지 않은 생명을 생각하는 남자의 표정이었고 기쁨과 설렘, 그리고 책임감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민설아의 몫이 아니었다.
“그런데 의사가... 아직 아기가 좀 불안정하대. 당분간 내가 옆에서 돌봐야 해. 조금만 참아 줘. 형수님이 퇴원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우리도... 예전처럼 지낼 수 있어.”
민설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한마디는 마치 바람 한 줄기처럼 가볍고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하선우는 안심한 듯 몇 마디만 더 하고 바로 강서진의 병실로 향했다.
남겨진 민설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걸음은 아팠지만 마음이 더 아팠다.
복도를 지나고 있던 민설아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장면을 보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선우가 강서진에게 죽을 떠먹이며 다정한 눈빛으로 배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 시선은, 예전에 오롯이 민설아만을 향하던 그 따뜻한 표정 그대로였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다른 여자를 향해 있었다.
민설아는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눈가에서는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둘이 그렇게 좋다면... 그냥 완전히 보내주는 게 맞겠지.’
그날 오후, 민설아는 퇴원을 신청했다.
민설아는 가정법원 도장이 찍힌 이혼 서류를 한때 둘이 함께 골랐던 식탁 위에 조용히 올려두었다.
그리고 이미 정리해 둔 짐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기차역 대기실.
사람들 사이로 울려 퍼지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산림 지대 안내... 겨울철에는 기온이 영하 사십 도까지 떨어지며...”
민설아는 북쪽으로 향하는 단 한 장의 기차표를 끊었다.
열차가 서서히 움직이자 창밖의 풍경은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그 순간, 하선우와 함께한 기억들도 함께 휩쓸려가는 듯했다.
하선우가 군복을 벗겨 주며 건넸던 첫인상의 따뜻함, 청혼하던 날의 어설픈 긴장감, 처음 입맞춤하던 순간 하선우의 떨리던 손...
모든 달콤했던 순간들이 차창에 부딪히는 쇳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져 길게 이어진 철길 위로 흩어져 나갔다.
그렇게 해서, 민설아가 뒤돌아볼 이유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