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아, 네.”
박지연은 짧게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반응에 소이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름이 뭐래?”
“안 알려줬어. 직접 만나서 소개하고 싶대.”
박지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심지어 불쾌한 기색까지 내비쳤다.
“지금 나랑 기싸움 하자는 거야? 이름도 안 알려주고.”
소이현이 생각하다가 답했다.
“너한테 서프라이즈를 주려고 그랬을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겠어. 만약 그 사람이 너처럼 대단한 사람이라면 많이 놀라겠지만 아니라면 다 허세야.”
소이현이 말을 잇지 못했다.
말을 마친 박지연은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토요일 약속 잊지 마.”
소이현은 박지연의 핸들을 보다가 문득 손이 근질거렸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레이싱 경기였다.
...
그 후 소이현은 매일 탁정철과 연락하며 소민찬의 건강 상태를 물었다.
탁정철은 소민찬이 병상에 누워서도 일만 한다고 했다.
회사에 갑자기 200억 원이라는 거액의 투자가 들어오자 의욕이 넘쳐 다음 날 바로 업무에 복귀했다.
소이현은 소민찬의 몸이 버티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차단당한 상태였다.
해킹 기술이 있어 소민찬에게 연락하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하면 남매 관계만 더욱 악화될 뿐이었다.
하여 전화는 포기하고 나중에 시간 날 때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토요일, 소이현은 박지연과 레이싱 경기를 보러 가기로 약속했다. 준비를 마치고 출발하려는데 데리러 오겠다던 박지연이 갑자기 일이 생겼다면서 소이현에게 먼저 혼자 가라고 했다.
이혼 전 소이현은 강도훈의 명의로 된 차를 탔다. 그리고 어제 그녀의 명의로 흰색 랜드로버를 한 대 구매했다.
집에서 차로 가면 지도상으로는 한 시간 반 거리였다. 소이현은 교통 법규를 어기지 않는 선에서 뛰어난 운전 실력을 발휘해 딱 한 시간 만에 도착했다. 도착한 후 곧장 박지연이 예약한 VIP 룸으로 향했다.
이미 관중들이 입장하고 있었고 VIP 구역이 그리 붐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이 꽤 있었다.
소이현은 그녀와 부딪힐 뻔한 스태프를 피해 계속 걸어갔다. 방 번호가 순서대로 있어 몇 개만 더 지나면 되었다.
소이현이 어느 한 VIP 룸을 지나가던 그때 문이 열려 있어 안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지나가려는데 문득 익숙한 이름을 들었다.
“네. 저희 게임 회사가 바로 룬 코드예요.”
‘룬 코드? 민찬이의 라이벌 회사인데? 여기서 이렇게 마주치다니.’
소이현이 발걸음을 멈췄다.
“저희 누나를 봐서 저한테 투자하신 거 알아요. 인정하기 싫지만 처음으로 누나가 하연서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릴 때 맞았던 것도 이젠 다 용서됩니다.”
그 말에 소이현은 순간 멍해졌다. 몇 마디만 들어도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말하는 이가 바로 하연서의 남동생이자 이모의 의붓아들 하일권이었다.
하일권과 소민찬이 동갑이라는 사실을 이모에게서 들었다.
“대표님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많은 기술 인재를 회사에 데려오지 못했을 거예요. 아 참, 대표님, 형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하일권의 목소리에 아첨과 감사의 뜻이 가득했다.
소이현의 표정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예상했던 대로 강도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넌 연서 동생이니까 내 동생이나 마찬가지야. 너무 격식 차릴 필요 없어.”
하일권이 신난 얼굴로 말했다.
“네, 형.”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다.
“젊으니까 열심히 해봐.”
소이현은 강도훈이 젊은 사람을 격려하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의 친여동생 강지유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하일권이 강도훈의 관심을 받는 이유는 간단했다. 하연서의 동생이기 때문이었다.
강도훈은 소이현에게도 남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결혼 3년 동안 소민찬에 대해 단 한 번도 먼저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다른 가족은 물론이고 소민찬이 지금 강도훈의 앞에 서 있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게 바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였다.
예전의 소이현이었다면 이 일로 며칠 동안 괴로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이혼했고 강도훈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도 크게 받지 않는다.
다만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최단 시간 내에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소화해낼 수 있게 되었다.
인천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강도훈을 어렵사리 만난 자리라 하일권은 그와 가까이할 수 있는 그 어떤 기회도 놓치려 하지 않았다.
“누나가 곧 경기에 나가니까 형도 이 방에서 같이 봐요. 제가 고른 방인데 시야가 제일 좋아요.”
지난 몇 년간 강도훈이 레이싱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소이현은 그가 왜 이곳에 와 있을까 의아했었다.
이제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설명되었다. 하연서가 레이싱 경기에 참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강도훈이 말했다.
“알았어. 나가서 전화 좀 하고 올게.”
박지연이 예약한 방이 앞쪽에 있었다. 소이현은 그들이 문을 닫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지나가려 했다. 그래야 발각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강도훈이 전화하러 밖으로 나올 것 같았다.
복도가 하나라 소이현은 재빨리 뒤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모퉁이에서 몇 분 기다린 후 강도훈이 통화를 마쳤겠다 싶어 다시 나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소이현은 그대로 자리에 굳어버렸다.
두 사람의 거리가 1m도 채 되지 않았다. 이혼 후 그와 이렇게 가까이 선 게 처음이었다.
그에게서 익숙하고 좋은 남자 향수 냄새가 났다. 그 냄새에 과거의 기억이 문득 떠오른 소이현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강도훈이 오늘 캐주얼 룩을 입어 정장을 입었을 때의 압박감은 없었지만 범접하기 어려운 기세는 여전히 숨길 수 없었고 귀티나고 우아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그러나 소이현을 쳐다보는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했다.
소이현의 기억이 맞다면 그가 입은 이 옷은 그녀가 직접 가게에 가서 받아온 것이었다.
선물로 사준 것이 아니라 그의 지시대로 옷만 가져다줬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 선물도 자주 주게 된다. 과거 소이현은 강도훈을 너무 사랑했기에 그의 취향에 맞춰 옷을 골라 선물했으나 그는 한 번도 입지 않았다.
그런데 왼손 약지에는 하연서가 선물한 커플 반지를 계속 끼고 있었다. 한 번도 빼지 않았단 말인가?
소이현을 보자마자 강도훈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녀를 마주한 남자는 평소처럼 무덤덤했고 목소리도 차가웠다.
“언제부터 레이싱에 관심이 있었어?”
강도훈은 예전에 그녀가 운전하는 차에 타본 적이 있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녀의 운전 솜씨가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소이현이 말했다.
“친구랑 같이 왔어.”
“그럴싸한 이유네.”
강도훈의 목소리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소이현이 하연서가 경기에 참석한다는 걸 미리 알고 두 사람의 데이트를 망치려 쫓아온 거라고 생각했다.
소이현은 해명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문득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껴 다시 다물었다.
설령 해명하더라도 강도훈은 믿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그녀가 찔려서 발뺌한다고 생각할 것이기에 헛수고할 필요가 없었다.
“내일 여섯 시에 본가로 와.”
말을 마친 강도훈은 그녀의 왼손 약지를 힐끗 봤다. 결혼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다.
3년 동안 소이현은 결혼반지를 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직도 연기하고 있어? 언제까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할 건데?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강도훈은 인내심을 잃고 차가운 얼굴로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