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임신이라는 두 글자를 들은 순간 소이현은 바늘로 심장을 쿡 찌른 것처럼 아팠다.
유산은 3년간의 결혼 생활에서 겪은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남들이 아는 게 싫어 박지연에게조차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강지유가 예고 없이 그녀의 상처를 건드렸다. 옆으로 늘어뜨린 소이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강지유는 그녀의 변화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데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임신했다면 온 세상에 알리고 싶어서 안달 났겠지. 아이로 강씨 가문 며느리 자리를 지키고 싶으니까. 정말 1초도 숨기지 못했을 거야.”
과거 강지유는 그녀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두고 수도 없이 모욕하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소이현은 꾹 참았다. 아이를 정말로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참을 필요가 없었다.
“다 알면서 뭘 물어? 비켜.”
“벌써 화내면 재미없는데? 우리 오빠가 하연서의 생일을 챙겨준 거 알면 기절초풍하겠는데?”
어릴 적부터 강도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강지유는 다른 여자가 오빠를 빼앗아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꼭 새언니를 골라야 한다면 소이현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하연서를 고를 것이다.
집안이 좋은 건 물론이고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가진 인재였다. 돈, 외모, 재능 중에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게다가 취미도 광범위했다. 레이싱, 암벽 등반, 스키, 서핑 등 못 하는 게 거의 없었다.
강지유는 자유분방한 삶을 동경했다. 하연서는 재능으로 어른들의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취미로 강지유의 취향까지 완벽하게 저격했다.
3년 전 하연서가 유학을 간 것도 자신의 경력을 쌓기 위해서였다.
강지유는 하연서처럼 모든 면에서 뛰어난 여자야말로 강도훈과 어울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소이현이 할 줄 아는 거라곤 요리밖에 없는데 그게 도우미와 뭐가 다른가? 무엇으로 하연서와 비교한단 말인가?
다행히 강도훈도 소이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3년 동안 강도훈이 소이현의 생일을 챙겨주는 걸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하연서의 생일은 아주 정성껏 챙겨줬다. 파티 현장을 세팅했고 선물까지 직접 만들었으며 인천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초대하기까지 했다. 그 정성이 정말 대단했다.
강지유도 성인이 된 후 강도훈이 손수 만든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강지유가 일부러 모욕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소이현은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지나쳤다.
그런데 그때 강지유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놔.”
‘대체 언제까지 귀찮게 할 셈이야?’
소이현의 멘탈이 이렇게 강할 줄은 강지유도 몰랐다. 이제 더는 연기할 생각이 없었다.
“동생한테 돈 주러 온 거지?”
그녀의 두 눈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그 모습에 강지유는 원하던 바를 얻었다는 듯 낄낄 웃었다.
“네가 온 거 진작에 봤어. 아까는 일부러 무슨 일로 병원에 왔냐고 물었던 거니까 화내지 마.”
역시나 일부러 모욕하러 온 것이었다.
소이현의 눈빛에 서린 차가움을 본 강지유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우리 강씨 가문의 돈을 쓰면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봐? 넌 염치도 없어?”
소이현이 싸늘하게 답했다.
“그건 내 돈이야.”
강지유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빈털터리잖아. 우리 집안 돈으로 먹고사는 주제에 돈이 어디 있다고. 비서 노릇 해서 번 돈이라고 우기려고? 웃겨서, 원.”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오빠 돈으로 몰래 네 친정을 돕는 건 눈감아줄 수 있어. 가끔 그렇게 손 벌리는 친척들이 있거든. 몇 푼 안 되는 돈이기도 하니까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다음은 없어. 다음에 또 이러면 오빠한테 이를 거야.”
소이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강지유는 오빠에게 일러바치는 것이 그녀를 제압하는 방법임을 알고 있었고 또 언제나 효과 만점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면 소이현이 예전처럼 빌 거라고 기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소이현은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살짝 힘을 주어 강지유의 손을 뿌리치고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버 좀 하지 마. 그리고 네 오빠랑은 이제 아무 사이 아니야...”
“풉.”
강지유가 크게 웃었다.
“네가 우리 오빠를 놓아줄 리 없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정말 오빠를 떠난다면 네 성씨로 바꿀게.”
그 말에 소이현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강도훈과 이미 이혼했고 강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보든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과 엮이면서 증명하려 하는 건 본인의 정력만 소모시키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몇 마디 말로 타인의 편견을 바꿀 수 없다. 해명이 무의미하다면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조금 전 감정이 격해졌던 건 유산 때문이었다.
소이현은 마음을 가라앉힌 후 강지유를 덤덤하게 쳐다봤다.
“마음대로 생각해.”
그러고는 강지유에게 차가운 뒷모습만 남긴 채 가버렸다.
소이현이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강지유의 얼굴이 다소 어두워졌다.
“잘난 척하긴.”
강지유는 친구와 함께 병원에 왔다. 약을 받고 온 친구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누구야?”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개.”
그녀의 표정에 경멸이 가득했다.
“그래? 개한테 물렸어?”
강지유가 콧방귀를 뀌었다.
“주인 무는 개가 어디 있어? 저 개는 아무리 차도 안 떨어져서 좀 귀찮을 뿐이야.”
하연서의 귀국으로 소이현이 질투 때문에 미쳐 날뛰고 있다고 허재윤에게서 들었다. 겉으로는 이혼 시위를 하고 있지만 뒤로는 강도훈의 행방을 몰래 캐고 있다고 했다.
밀당 같은 구식 수법이나 쓰는 사람이라면 강지유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소이현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은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강지유는 곧바로 소이현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친구와 함께 떠났다.
그때 강도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소이현 때문에 상했던 기분이 싹 가셨다.
“무슨 일이야, 오빠?”
강도훈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 귀국했어.”
“그 사람?”
강지유는 잠시 멍했다가 머릿속에 누군가의 근엄한 모습이 떠올랐다. 순간 온몸이 굳어졌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강도훈의 말투가 별로 좋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이번 주말에 본가에서 모이자고 하셨어. 만나기 싫으면 지금 바로 다른 곳으로 피신해. 할아버지께는 내가 대신 말해줄게.”
강지유는 순간 감동이 밀려왔다.
‘역시 오빠는 날 감싸준다니까.’
그 사람은 사실 그녀의 또 다른 오빠였다. 하지만 남보다도 더 서먹한 관계였다.
어렸을 적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소년의 날카로운 눈빛과 차가운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았었다.
강지유는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고 그에게 말도 제대로 걸지 못했으며 심지어 트라우마까지 생겼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그 사람이 여전히 무서웠다.
하지만 이건 너무 창피한 일이었다.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일부러 센 척했다.
“그 사람이랑 오래 안 만났잖아. 이젠 하나도 안 무서워.”
강도훈은 강지유에게 통보하러 전화한 것이었다. 어떻게 하든 그녀의 선택이라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오빠, 잠깐만.”
“왜?”
강지유가 강도훈의 태도를 떠봤다.
“아까 병원에서 소이현을 봤어.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야? 괜찮은지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강도훈은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싸늘하게 말했다.
“얼른 집에 들어가기나 해.”
휴대폰 너머로 통화 종료음이 들렸다.
“오빠 반응은 항상 이렇다니까. 이젠 놀랍지도 않아.”
진작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소이현이 강도훈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강지유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 역시 소이현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
소이현이 차로 돌아왔을 때 박지연은 동료와 통화 중이었다. 한 과학기술 회사의 대표라 박지연은 늘 바빴다. 그런 그녀가 시간을 내어 소이현의 생일을 축하해준 것에 소이현은 너무나 감동했고 또 고마웠다.
그녀가 돌아온 걸 본 박지연은 몇 마디 더 통화한 후 전화를 끊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동생은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
박지연이 차에 시동을 걸며 짓궂게 물었다.
“왜 이렇게 빨리 나왔어? 동생이 너 안 만나겠다고 한 거 아니야?”
그녀가 눈치챘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소이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걔가 뒤끝이 좀 길어.”
박지연이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걔처럼 까다로운 남동생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안 그러면 제 명에 못 살았어.”
소이현은 잠깐 말을 잇지 못하다가 화제를 돌렸다.
“아까 무슨 통화 했어?”
“회사 동료인데 카이스트 선배 한 분을 소개해주겠대. 박사 출신이고 AI 업계의 최고 인재래. 그런데 아무리 최고 인재여도 너만큼 대단하겠어? 만나든 안 만나든 다를 바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동문인데 만나봐, 한번.”
“그러지, 뭐. 약속 잡아도 보름 후에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엄청 바쁘거든.”
실행력이 강한 박지연은 바로 동료와 약속 시간을 잡았다. 전화를 끊기 전 뭔가 문득 생각나 동료에게 물었다.
“아 참, 그 선배라는 사람 이름이 뭐예요?”
소이현의 시선이 박지연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