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전화를 건 사람은 탁정철, 소민찬의 대학교 동창이었다. 소민찬은 소이현의 친동생으로 오늘 졸업했다.
대학교 때 탁정철과 함께 무한 차원이라는 게임 회사를 창업했다.
외삼촌이 해외에 이주하면서 200억 원과 집 한 채를 남겼는데 소민찬은 주저 없이 200억 원을 선택했고 그 돈을 회사의 초기 자금으로 사용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소이현이 바로 말했다.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박지연이 그녀를 병원까지 데려다줬다.
병원에 도착한 후 소이현은 박지연에게 차에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황급히 병실로 향했다.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소민찬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한테 왜 전화했어?”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걸음을 멈췄다. 문틈 사이로 침대에 누워있는 소민찬이 보였다.
소민찬은 아직 20대 초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난 몇 년간 창업하면서 많이 성숙해졌다. 이젠 소년에서 남자로 성장하는 분위기가 조금 묻어 있었다.
안색이 다소 창백하긴 했지만 상태가 그래도 나쁘지 않은 걸 보고서야 소이현은 조금 안심했다.
탁정철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싸늘한 태도의 소민찬을 쳐다봤다.
“네 친누나야. 친누나한테 연락하지 않으면 누구한테 연락해?”
소민찬의 목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누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아니, 대체 누나를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내가 보기엔 참 괜찮은 사람 같던데.”
소민찬은 과거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은 듯했다.
“계속 얘기할 거면 그냥 꺼져.”
“알았어. 난 먼저 꺼질 테니까 푹 쉬어.”
탁정철은 걸어 나가면서도 중얼거렸다.
“그런 누나가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소이현은 탁정철이 문 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고는 재빨리 옆으로 몸을 피했다.
탁정철이 문을 연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눈짓하자 그는 바로 알아듣고 못 본 척 문을 닫았다.
병원 복도.
소이현이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 카드 안에 200억이 있으니까 비상금으로 써. 민찬이한테는 내가 준 거라고 말하지 말고.”
과거 루기X를 개발했을 때 박지연이 400억 원에 사용권을 사들였다. 하여 이 돈은 소이현의 개인 자산이었다.
평소 돈을 별로 쓰지 않는 소이현이라 권성 그룹에서 받는 월급만으로도 충분했기에 400억 원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탁정철은 소이현이 아무렇지 않게 200억 원을 내놓는 걸 보고는 충격에 빠졌다.
“누나, 난 그냥 민찬이 보러 오라고 전화한 거지, 돈 달라는 뜻이 아니...”
탁정철이 말끝을 흐렸다. 켕기는 게 있었으니까.
소이현은 그의 마음을 바로 간파했다.
“사양하지 말고 받아.”
외삼촌에게서 받은 초기 자금 200억 원이 있었지만 대형 게임을 개발하려면 200억 원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소민찬은 게임 개발에 능했으나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는 자본가들과 관계를 이어나가야 했기에 술자리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소이현은 동생이 잘 버텨낼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 병원에 실려 올 줄은 몰랐다.
탁정철이 남매의 관계를 잘 알고 있어 이유 없이 전화할 리 없었다. 소민찬의 건강에 큰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무조건 돈 문제일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체면 때문에 돈 달라는 소리를 잘 하지 못했다.
탁정철이 다시 사양하기 전에 소이현은 은행 카드를 쥐여주었다.
그는 카드를 내려다보면서 소이현이 건네는 위로를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늘 한 투자자를 만났는데 술을 다 마시면 20억 원을 투자하겠다는 소리에 소민찬은 망설임 없이 술을 마셨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에서 술을 마신 탓에 중간에 토하기까지 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탁정철이 그만하자고 했지만 소민찬은 포기하지 않고 버텼다. 20억 원을 위해서 타들어 가는 위장을 참으며 계속 마신 것이었다.
그런데 술을 다 마셨는데도 상대방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것들을 속이기 쉽다며 머리가 단순해서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없을 거라고 노골적으로 모욕했다.
돈이 절실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런 모욕을 당할 리 있었겠는가?
탁정철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소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소이현의 남편이 유명한 강진 그룹의 대표이자 자산이 수십조 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형부가 몇백억이라도 투자해준다면 아무 걱정 없이 회사를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민찬과 소이현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다. 소민찬의 목에 칼을 대도 절대 형부에게 부탁하지 않을 것이다.
탁정철은 소민찬만큼 고집스럽지 않았다. 강도훈의 처남을 사칭하여 강도훈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전통문화를 결합해서 개발한 대형 3A급 게임을 1분 안에 빠르게 설명했다. 바로 투자금을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경비원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탁정철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더 기가 막힌 건 최근 강진 그룹이 그들의 경쟁사에 투자했다는 사실이었다. 이건 보란 듯이 그들의 체면을 깎는 행동이었다.
그는 소이현에게 강도훈과의 관계를 물을 수 없었다.
“누나, 뜸 들이지 않고 솔직하게 얘기할게요. 나랑 민찬이가 이렇게까지 노력했던 건 경쟁사가 우리 회사의 핵심 기술 인력을 빼갔기 때문이에요. 그 바람에 회사가 큰 타격을 받았고 심지어 부도나기 직전까지 왔어요. 그래서 이 200억 원이 우리한테는 엄청 소중한 돈이에요. 이 돈이 없으면 아마 회사가 무너졌을 거예요.”
심각한 말이었지만 탁정철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고 오히려 의욕이 넘쳤다.
“누나, 이제 우리 회사의 대주주는 누나예요. 게임이 성공해서 돈을 벌면 누나한테 배당금 줄게요.”
그는 소민찬과 이를 악물고 노력해서 사람들에게 실력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너희 일에만 집중해.”
사업 경쟁은 소이현이 신경 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능력 범위 내에서 도울 수는 있겠지만 구체적인 어려움은 그들 스스로 헤쳐나가야 했다.
탁정철은 소이현에게서 누나의 관심과 따뜻함을 느꼈다. 저녁에 받았던 억울함과 분노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했다.
탁정철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누나, 들어가서 민찬이 좀 볼래요?”
소이현이 마음속의 씁쓸함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민찬이는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아. 안 들어가는 게 좋을 거야.”
탁정철은 그녀의 눈에 서린 쓸쓸함을 보았다. 하지만 외부인이라 해줄 수 있는 게 없었고 하고 싶은 말도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소이현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민찬이 잘 부탁해.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얘기하고. 들어가 봐.”
“네.”
탁정철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한 후 순순히 들어갔다.
이제 이 200억 원에 대해 소민찬에게 어떻게 둘러댈지 고민해야 했다. 다행히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탁정철과 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이현은 병원에서 강도훈의 여동생 강지유와 마주쳤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강지유와 소민찬이 동갑이었는데 그녀는 어릴 때부터 부모와 오빠의 사랑을 받으며 온 가족의 관심 속에서 자랐다.
그 때문에 강도훈에게 지나치게 의지했다.
강도훈이 결혼한 후 강지유는 새언니인 소이현이 오빠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머니 봉주은과 마찬가지로 소이현을 얕잡아봤기에 친절하게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강지유와 마주치기 싫었던 소이현은 일부러 다른 길로 가려 했다. 그런데 강지유가 그녀 앞으로 다가와 길을 막아섰다.
소이현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췄다.
강지유는 그녀의 몸을 훑으면서 대놓고 경멸했다.
“집에서 우리 오빠를 챙기지 않고 병원에 와서 뭐 하는 거야?”
소이현이 강도훈과 결혼한 후 강씨 가문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강도훈을 잘 돌보는 게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고 개인적인 일은 모두 뒷전이라고 생각했다.
과거 그녀는 모든 신경을 그에게만 쏟았고 좋은 아내가 되려 했으며 시댁 식구들에게 예쁨을 받으려고 노력했었다.
설령 모욕을 당해도 참기만 했다. 왜냐하면 일을 크게 만들면 수습하기 곤란해지고 또 소이현 본인도 싸우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시댁 식구들의 웬만한 잔소리에는 끄떡없었다.
이젠 이혼했기에 더 이상 맞출 필요도, 환심을 살 필요도 없었다.
소이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볼일이 있어서.”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우리 오빠를 돌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뭔데?”
강지유가 갑자기 화제를 돌리더니 소이현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혹시 임신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