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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순간 당황한 나는 바로 노트북을 닫았다. 오른손에 불교 염주를 든 채 방 안으로 천천히 들어온 고수혁은 여전히 도도하면서도 차가운 아우라를 내뿜었다. 컴퓨터를 흘깃 보긴 했지만 다행히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얘기 좀 하자.” 고수혁이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 나는 그 여느 때보다도 더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그래. 얘기 좀 하자.” 하지만 고수혁은 오늘 밤 서아현 모녀의 행동에 대해 전혀 미안해하거나 변명 같은 걸 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차갑게 한마디 했다. “불당을 부수는 짓은 다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도 이제 어른이니 네 감정 컨트롤은 할 줄 알아야지.”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되물었다. “그럼 넌? 나를 때린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감정 컨트롤 하고 때린 거야?” 고수혁이 말했다. “아까는 네가 다미를 해치고 있었으니까. 난 그저 네가 진정하기를 바랐을 뿐이야.” 내 마음속의 분노와 원한이 한순간 무력해진 느낌이었다. “고수혁, 이제 그만 나가. 졸려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 거의 간청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좀 놔주면 안 돼? 나 너무 피곤해.” 나한테 가장 소중한 것을 파괴한 후에도 왜 내 심장까지 도려내려 하는 걸까? 유골함에 시선이 스친 고수혁은 떨리는 손을 내밀어 만지려 했지만 나는 바로 옆으로 치웠다. 손이 허공에서 굳어진 고수혁은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고수혁, 너는 만질 자격이 없어.” 고수혁은 얼굴에 약간 분노의 기색이 떠올랐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방을 떠났다. ... 다음 날, 별장의 거실은 여전히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아침 일찍, 다미는 젊은 가정부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얼굴의 가정부들 모습에 나는 유영자에게 한마디 물었다. 그제야 고수혁이 다미를 위해 특별히 젊은 가정부들을 고용한 것을 알았다. 어젯밤 내 딸의 유골함이 부서진 비극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은 모든 걸 깨끗이 잊은 듯했다. 슬퍼하고 절망하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고수혁은 소파에 앉아 염주를 돌리며 이리저리 뛰노는 다미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꽤 오래전 고수혁도 한때 나에게 마음을 써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그때의 기억들은 지난 몇 년간의 결혼 생활 속에서 닳아 없어져 이제는 애를 써야 떠올릴 수 있었다. 거실에는 새로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 유영자가 조용히 한숨을 쉬며 내 귀에 속삭였다. “저 여자가 카펫에 유골이 묻어 다미에게 불길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어요. 대표님이 그 말을 듣고 카펫을 바꾸라고 하셨어요.” 속으로 코웃음을 친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상관없어요. 진작 바꿨어야 했는데.” 이 집의 모든 것, 나를 포함하여 한 달 후면 모두 새로운 것으로 바뀔 것이다. 내가 내려온 것을 발견한 다미는 어젯밤 내가 서아현을 때리던 생각이 떠오른 듯 눈동자에 두려움이 가득 찼다. 그러더니 잘 놀던 숨바꼭질도 멈추고 급히 고수혁의 품으로 달려갔다. 자연스럽게 다미를 안은 고수혁은 애매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밥 먹자.” 식탁 앞에 앉은 뒤 고수혁은 품에 안긴 소중한 딸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심장이 바늘에 찔리는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천천히 고수혁 뒤를 따랐다. 하지만 서아현은 오늘 아침 부엌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얼굴로 먹고사는 톱스타인지라 나한테 맞고 얼굴이 부었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서기 부끄러웠을 것이다. 식탁 위 전부 채소밖에 없는 아침 식사를 보니 전혀 식욕이 없었다. 게다가 빈혈이 더 악화된 듯 머리가 계속 어지러워 걸을 때마다 몸이 휘청거렸다. 그때 가정부가 또 다른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 풍성한 어린이 식사로 햄, 계란 프라이, 삶은 새우까지 있었다. 다미는 고기를 보자 눈빛을 반짝이며 맛있게 먹었다. 고수혁은 애정 어린 손길로 다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천천히 먹어, 아무도 네 거 뺏어 먹지 않으니까.” 그때 다미가 갑자기 입술을 삐죽이며 한마디 했다. “아빠, 엄마도 나처럼 고기 먹게 해주면 안 돼요? 제발 부탁이에요!” 다미가 두 손을 모아 고수혁을 계속 조르자 고수혁의 차가운 얼굴은 봄바람이 스며든 듯 부드러워졌다. “알았어. 아빠가 약속하면 되는 거지?” “아빠 최고!” 그러자 어린 소녀는 재빨리 고수혁의 얼굴에 입술을 맞췄다. 두 사람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혼자 상상했다. 만약 내 딸이 그때 죽지 않았다면 고수혁도 우리 아이를 소중히 여겼을까? 하지만 이 답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유영자가 흰 쌀죽을 내 앞에 놓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아무 맛도 없어 보이는 채소와 흰 쌀죽을 밀어내며 고수혁에게 물었다. “왜 내 음식은 달라?” 고수혁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흘깃 보았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다미에게 밥을 먹이며 말했다. “어제 네가 다미 앞에서 고기를 먹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다미도 네 방에 가서 뒤지지 않았을 거야. 네가 그렇게 행동했으니 유골함도 그렇게 된 거지, 다 네 자업자득이야.” 피해자가 유죄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순간 고수혁은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렸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 밥은 집에서 먹지 않을게. 그러니 내 건 만들 필요 없어.” 고수혁이 있어야만 내가 밥을 먹고 사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밖에 나가면 널린 게 레스토랑과 편의점이고 밥은 어디서든 먹을 수 있다. 게다가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데 왜 여기서 이런 꼴을 당하며 살겠는가? 하지만 몸을 돌리려는 순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이마를 짚으며 몸을 지탱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내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바로 뒤로 쓰러졌다. 의식을 잃기 직전 나는 누군가의 몸에 부딪혀 쓰러진 것 같았다. ...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주위에 유영자밖에 없었다. 수액 관을 통해 짙은 붉은색 액체가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빈혈이 심각해 수혈할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사모님, 정신이 드세요?” 유영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놀랐어요. 아침을 드시지 않았으니 죽이라도 드세요. 여기에 찐 만두도 있어요.” 나는 고기 한 점 없는 음식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고수혁은 서아현을 위해 룰을 깰 수 있고 서아현 모녀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게 했지만 그에게 배신당한 나는 그가 정한 룰 들을 참아야 했다. 내 몸이 이런 상태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고수혁은 나에게 약을 주고 수혈을 해줄지언정 음식으로 내 몸을 치유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 어떤 약보다, 수혈보다 음식이 제일 부작용이 없을 텐데 말이다. 유영자에게 서아현 모녀와 같은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나는 아직도 서아현이 가진 것을 나도 가질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유영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모님, 그 여자 아직도 집에 있어요. 만약 제가 사모님에게 고기 요리를 해준 걸 보면 분명 대표님께 고자질할 거예요. 그러다가... 대표님이 불쾌해하시면 어떡하죠?” “알겠어요.” 유영자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호출 버튼을 눌러 간호사에게 내가 먹고 싶은 것들을 구내식당에서 사 오라고 했다. 유영자는 내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한마디 위로를 건넸다. “사모님, 오늘 사모님이 쓰러졌을 때 대표님이 바로 잡아 주셨어요. 오늘도 회사 일 때문에 가긴 했지만 급한 일만 없었더라면 분명 병실에 남아서 직접 사모님을 돌보셨을 거예요.” 유영자가 말을 마치자마자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화면을 보니 절친 송미경이었다. “깜짝 놀랐어! 고수혁이 사생아를 데리고 우리 유치원에 등록하러 온 거 있지? 이제는 전혀 숨기지도 않을 건가 봐!” 송씨 가문은 해항시에서 가장 좋은 사립 명문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송미경은 유치원에서 등록 심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고수혁에게 급한 ‘회사 일’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고수혁과 결혼한 지 4년이 되었지만 고수혁은 한 번도 공개 석상에 나와 함께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애인과 사생아를 데리고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내 마음은 이제 마비된 것처럼 더 이상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송미경에게 요즘 일어난 일들을 간단하게 이야기하자 내 말을 다 들은 송미경은 바로 한마디 했다. “너 지금 어디야? 바로 갈게!” 송미경과 통화를 마치자마자 내 검사 결과를 들고 들어온 의사는 매우 엄숙하게 나에게 말했다. 장기간 불균형한 식사를 한 탓에 빈혈이 심각할 뿐만 아니라 이미 위축성 위염을 유발했으며 계속 방치하면 암으로 변할 수도 있다고 했다. ‘암'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죽음이 처음으로 이렇게 가까이 다가왔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위가 아팠던 이유가 장기간 채식을 한 것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고수혁을 사랑하기 위해 내 목숨을 바쳤다. 하지만 앞으로는 나 자신만을 잘 사랑할 것이다. 의사가 자리를 뜬 후 유영자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이번 일 대표님께 제대로 얘기해야겠어요. 사모님이야말로 대표님 아내인데 왜 그 여자는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먹고 사모님만 이렇게 아파야 하는데요? 사모님은 건강까지 잃게 생겼는데 대표님은 왜 사모님께 이렇게 냉담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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