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고수혁이 왔다는 말에 박인주도 더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 앞에 나타난 고수혁은 예전처럼 공손하고 예의가 발랐지만 뼛속까지 배어 있는 오만함은 그대로 드러났다.
“아버님, 어머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다행히 고수혁은 우리 부모님을 무안하게 하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야. 우리도 방금 왔어. 세영이랑 이야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
“볼일 있으면 계속 해, 우리도 할 얘기가 많으니까.”
한마디씩 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가요. 엄마. 일단 밥부터 먹어요.”
밥 먹을 때 고수혁은 상석에 앉았고 부모님과 나는 고수혁의 옆자리에 앉았다.
뭔가 말하려던 윤태수는 고수혁의 표정을 살피며 뭔가 망설이는 듯했다.
“수혁아... 내가 부탁 하나 하고 싶은데...”
윤태수의 태도는 비굴하다 못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릴 정도였다.
고수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알아요. 윤성 그룹이 요즘 많이 힘들다는 거, 자금 문제는 걱정하지 마세요. 계약서는 가져오셨죠?”
윤태수가 바로 대답했다.
“가져왔어. 가져오고말고.”
고수혁이 말했다.
“거기 두세요. 좀 이따 서명할게요. 내일 세영이더러 아버님께 가져다드리라 할게요. 돈은 늦어도 금요일 전에 윤성 가문 계좌로 입금될 거예요.”
고수혁의 한 마디에 윤태수와 박인주는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안도의 미소를 지은 두 사람은 고수혁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하며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세영이는 제 아내이니 윤씨 가문이 힘들 때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죠.”
고수혁의 말은 조금 전까지 불안해하던 박인주는 마음속 의심을 완전히 떨쳐버렸다.
게다가 성격이 솔직한 편이라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박인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영이와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까 안심이 되네! 어제 뉴스에서 서아현에게 스폰서가 있다고 하면서 사진을 봤을 때 수혁이 넌 줄 알고 걱정돼서 밤새도록 잠도 못 잤어!”
박인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와 고수혁은 얼굴이 굳어졌지만 이내 화제를 돌렸다.
그들이 떠난 후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이혼 합의서를 계약서의 마지막 페이지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서재로 갔다.
...
고수혁은 서재의 컴퓨터 앞에 앉아 업무 이메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따뜻한 노란색 조명이 고수혁의 차가운 얼굴을 선명하게 비췄다. 나는 한때 고수혁이 일에 집중하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사랑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후 계약서를 들고 고수혁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빠가 서명해 달라고 했던 계약서야.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지만 사인 부탁할게.”
나를 한 번 쳐다본 고수혁은 내가 더 이상 장난치지 않는 것을 느끼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알겠어? 농담도 적당히 해야 하는 거야.”
“응. 아까는 고마웠어. 우리 윤성 그룹 도와준다고 해서.”
마음속의 슬픔을 참으며 고수혁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서명하기 전 고수혁이 나에게 한마디 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이야기할 게 있어. 요즘 나 따라다니는 기자들이 너무 많아서 아현이와 다미를 집으로 데려오려고 해. 지엘 시티는 해항시에서 사생활 보호가 가장 잘 되는 별장 지역이니 여기에 살면 더 안전할 거야.”
목구멍이 마치 고구마를 삼킨 듯 꽉 막혀 질식할 것만 같았다.
고수혁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철한 사업가라는 걸 잠깐 잊었었다.
그가 주는 모든 선물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윤성 그룹도 공짜로 도와주는 건 아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한마디 내뱉었다.
“알았어.”
그러자 고수혁이 계속 말했다.
“그리고 다미와 아현이가 안방에서 지냈으면 좋겠어. 우리 다미에게...”
“알았어. 설명할 필요 없어. 다 알겠으니까!”
고수혁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럼 내가 게스트 룸으로 옮길게. 당신이 같이 안방 써.”
이 남자도 더 이상 내 것이 아닌데 같은 방을 굳이 쓸 필요가 있겠는가?
고수혁의 조건을 수락한 후 계약서를 꺼내며 말했다.
“이제 서명할래? 아빠가 기다리고 계셔서.”
고수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명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나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마지막 페이지에 이혼 합의서를 끼워 넣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