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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다행히 고수혁은 나를 어느 정도 신뢰하는 듯 페이지의 구석만 살짝 넘기며 서명이 필요한 곳에 이름만 적었다. 계약서의 내용조차 제대로 보지 않았다. 마지막 페이지의 ‘이혼 합의서’에 서명한 후에야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고수혁이 뭔가 발견할까 봐 그가 서명을 마치자마자 얼른 계약서를 가져갔다. 안방으로 돌아와 고수혁이 직접 서명한 이혼 합의서를 꺼내 책 사이에 숨겨 두었다. 이혼 숙려 기간은 이제부터 한 달이다. ... 그날 밤 안방에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방으로 돌아온 고수혁은 그의 애인과 사생아를 위해 절뚝이며 짐을 싸는 내 모습을 보고는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런 일들은 아주머니나 다른 가정부 시켜.” 고수혁은 비교적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이 잠잠해지고 두 사람이 나가면 다시 돌아오면 돼. 걱정하지 마, 오래 머물지 않을 거니까.” 피식 코웃음을 친 나는 고수혁의 진지한 얼굴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그럼 내가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야?” 고수혁의 얼굴이 즉시 차가워졌다. 그리고 이사를 가는 게 아니라 그저 방을 옮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옮길 물건은 많지 않았다. 스킨케어 제품과 옷가지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침실 옷장 꼭대기에 있는 나무로 된 작은 상자였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고 스스로 의자를 밟고 올라가 그 상자를 조심스럽게 내렸다. 사진 속 그 아이가 고수혁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면 이 상자 안에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이 들어 있었다. 다만 내 보물은 다른 아이들처럼 자유롭게 활보하며 살 수 없었다. 영원히 이 햇빛조차 들지 않는 상자 안에만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상자를 내리는 동안 발코니에 서서 전화를 하고 있는 고수혁은 사소한 것까지 세심하게 지시하며 비서에게 서아현과 그녀의 딸을 어떤 경로로 데려오는 것이 가장 좋을지 상의하고 있었다.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고수혁은 내가 이 상자를 품에 안고 있는 것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건 왜 가져가는 거야?” 검은 눈동자에는 약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순간 나는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아이가 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고수혁은 그래도 여전히 바람을 피웠을까? 내 아이도 고수혁의 보물이 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런 남자 때문에 계속 내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막 나가려는데 고수혁이 갑자기 내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 왜 이걸 가져가는 거야?” 나는 차가운 눈빛으로 고수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집에서 내 물건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이게 유일하니까.” 고수혁은 그나마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는지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졌다. 게스트 룸으로 짐을 옮긴 나는 이 상자를 가장 안전한 곳에 두고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다음 날 오전, 서아현과 그 어린 소녀가 별장에 도착했다. 한편 유영자도 한창 채소 요리뿐인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종류가 다양하긴 했지만 아무리 깔끔하고 정교하게 차려져도 실제 전부 풀떼기뿐이었다. 서아현과 아이는 이런 요리가 적응이 안 되는 듯했지만 고수혁에게 잘 보이기 위해 처음에는 맛있게 먹는 척했다. 서아현은 설득과 강요를 섞어가며 아이에게도 억지로 먹였다. 그 모습에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TV에서 반짝이는 톱스타도 결국 속물이었구나. 다행히 나는 서아현 팬이 아니었다. 요리를 몇 점 먹던 고수혁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유영자에게 물었다. “이 음식 재료, 오늘 공수해 온 거 맞아요? 그리고 밥맛도 이상한데요?” 유영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본 뒤 고수혁에게 설명했다. “대표님 식사, 전에는 사모님이 직접 다 만드셨어요. 밥도 사모님께서 직접 수입한 살에 송로버섯 가루, 터키 헤이즐넛 가루 등을 일정 비율로 섞어 한 거고요. 오늘은 사모님 몸이 안 좋으셔서 제가 비슷하게 하느라 했는데 사모님 손맛까지는 따라가지 못한 것 같아요.” 고수혁도 다른 사람이 한 요리 맛이 이렇게 다를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요리를 해주겠다는 말을 기다리듯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일부러 아무 말도 못 들은 척했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왜 시간과 정력을 들여 다른 여자의 남자를 챙겨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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