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워낙 회사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서 도도함을 유지하던 고수혁인지라 본인이 직접 나에게 요리를 해 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워낙 입맛이 까다로웠고 먹는 음식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았기에 고수혁은 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지시했다.
“채식 요리 잘하는 요리사 좀 알아봐. 급여는 문제가 아니니까 내일까지 데려오고.”
들어와서부터 지금까지 의지할 곳 없는 피해자처럼 행동하던 서아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윤세영 씨, 저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요. 이렇게 다미를 데리고 들어온 것도 좀 성급했던 것 같아요...”
나는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급하다는 걸 알면서도 억지로 들어온 거예요? 이 넓은 세상에 나와 고수혁이 사는 집 말고는 머물 곳이 없었어요? 서아현 씨, 평생 다른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야만 머물 곳이 생기는 거예요?”
내 말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서하연은 뭔가 반박하려다가 참는 듯했다. 그러다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고수혁을 바라보았다.
다만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건 나만 봤을 것이다.
다미는 나이가 비록 어렸지만 내 말투가 좋지 않다는 걸 느낀 듯 겁먹은 얼굴로 고수혁 앞으로 달려가 그의 무릎에 앉아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빠, 저 아줌마 누구예요? 너무 무서워요.”
“다미야, 무서워하지 마. 아줌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고수혁은 경고하는 눈빛으로 나를 봤지만 서아현 앞에서 나에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아마 이 모녀를 집까지 데려왔음에도 내가 그나마 ‘협조적’으로 나오자 어느 정도 미안한 마음이 든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이상 나에게 강요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본인 애인을 집까지 들였는데 웃으면서 맞이하라고 요구할 순 없지 않은가?
나와 고수혁이 예상외로 싸우지 않자 서아현은 기분이 확 잡쳤다. 테이블 위의 채소 요리들도 더욱 맛이 없었다.
그 모습에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고수혁이 불교를 믿은 지 3년, 나는 고기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사람인데도 고수혁과 함께 3년 동안 채식을 했다.
하지만 남자를 빼앗으려는 서아현은 기본적인 이것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먹을 만큼 먹고 배가 부르자 젓가락을 내려놓은 나는 그들의 복잡한 시선 속에서 자리를 떴다.
게스트 룸으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4년 가까이 살아온 집을 둘러보았다.
안방에서 게스트 룸으로 옮기니 오히려 손님처럼 느껴졌다.
어제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해 점심에 잠깐 눈을 붙이려 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문 앞에 큰 가방을 들고 서 있는 서아현이 보였다.
“윤세영 씨, 실례할게요. 여기에 윤세영 씨와 수혁 씨의 결혼사진이 있는데 이건 다미가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수혁 씨가 그래서... 이것 좀 보관 부탁드릴게요.”
“필요 없으니 쓰레기통에 버려요.”
무표정하게 말한 나는 바로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나의 화를 돋우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서아현은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급히 문틀을 막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윤세영 씨, 다미가 저와 수혁 씨 아이라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요. 그러니 화내지 마세요. 우리가 나간 다음에 이 사진들 다시 걸어 놓으시면 되잖아요.”
비밀?
두 사람 사이에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고? 그럼 나는 너희 두 사람 사이에 낀 장난감에 불과하겠네?
더 이상 서아현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그녀 손에 들린 큰 가방을 확 빼앗아 내 방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가방 안의 유리 액자가 깨지는 소리에 서아현은 당황했다. 하지만 일말의 아쉬움도 보이지 않는 내 표정에 서아현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했다.
아마 서아현 눈에 나는 남편에게 배신당해 이 집안에 한을 품은 여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내가 깨진 유리 조각들을 안고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를 바란 걸까?
하지만 서아현의 바램과 달리 나는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 가방을 흘깃 보며 말했다.
“사진은 내가 보관했으니 다른 거 없죠? 안방에 있는 나와 고수혁이 잤던 침대도 옮길까요?”
말문이 막힌 서아현은 아름다운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가방 속의 사진은 문 앞에 내버려 둔 채 다시 꺼내 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아주머니더러 버려 달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낮잠을 자고 깨어나 보니 인스타에 새로운 친구 추가 신청이 와 있었다.
프로필을 클릭해 보니 다미 사진이 보였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서아현이 나에게 친구 추가 신청을 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도 별생각 없이 친구 신청에 수락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인스타로 실생활을 공유하면서 24시간 내내 나를 자극하려는 것이었다.
무시하려고 생각했지만 저도 모르게 손이 근질근질해서 인스타 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서아현은 연예계 사람답게 인맥 관리가 아주 깨끗했고 처신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인스타에 가족사진 한 장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본인 얼굴이 나온 사진도 없었다.
하지만 고수혁과 다미의 얼굴은 아주 선명하게 찍혀 있었고 특별한 기념일마다 사진을 수두룩 올렸으며 글도 남겼다.
나는 임신했을 때 고수혁이 아빠가 되는 모습을 기대하며 혼자 상상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의 상상을 나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했지만 고수혁 애인의 인스타에서 답을 얻게 되었다.
화면을 천천히 내려 고수혁이 도대체 언제부터 바람을 피웠는지를 보려 했다.
그러다가 어느 한 날짜에서 갑자기 손이 멈추었다.
이것은 고수혁이 바람을 피운 날짜는 아니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날이었다.